언제 여행이 내게 왔을까
1984
조지 오웰이 상상했던 대로라면, 마음대로 여행도 못하는 통제와 감시의 전체주의 사회가 출현해야 할 1984년, 나는 처음으로 우리 동네를 떠났다. 여덟 살 인생 처음으로 엄마 없이 형과 함께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간 것이다. 일찍 학교에서 돌아온 날이었나, 일요일이었나? 무더운 여름이었다. 형이 중앙 도서관에 가자고 했다. 아마도 거기는 책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피서도 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더운 여름에 가자고 했던 것 같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심가로 가는 16번 버스에 처음 올랐을 때 요금 통에 동전이 통토동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다시 살아나고,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던 거리의 복잡한 풍경, 돌아오는 길의 불안한 석양, '해가 저렇게 지면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지금도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든다. 처음 집이 아닌 먼 곳으로 떠난 기억은 예상했던 것보다 선명했다.
그때 대구시 수성동에서 중앙도서관까지 갔던 경험에는 백팩을 앞에 내려놓고 눈 내리는 공항철도의 창밖을 보던 기억과 같은 색깔의 포스트 잍을 붙일 수 있겠다. 집에 돌아와선 꼬질꼬질한 바지를 갈아입지도 않고 시내까지 나갔다고 엄마한테 꾸중을 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머릿속은 버스의 부릉부릉 진동으로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2001
3명은 동면상태로 캡슐에 들어가 있다. 데이브와 프랭크, 두 명이 HAL9000이라는 컴퓨터와 목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으로 항해를 하고 있다. 장엄한 우주만큼이나 알 수 없는 앞 날을 그들은 그렇게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8년작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이다.
호메로스가 신들과 함께하는 세상의 여행 이야기를 읊은 지 2900여 년 지난 20세기에, 한 영화감독은 우주에서 겪는 여행 이야기를 영상으로 펼쳐 놓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순한 SF 과학영화로 끝나지 않는다. 우주여행을 통해 주인공 데이브는 환상적인 장면과 아주 길게 느껴지는 몇 번의 눈 깜박할 시간을 지나 자신의 죽음과 대면한다. 그리고 임종의 순간에는 인류 태초에 갑자기 등장했던 시커먼 벽기둥 같은 물체로 자신의 탄생과 연결된다. 목성을 향하던 여행은 지구보다 더 커 보이는 태아가 부유하고 있는 우주로 확장된다. 태아는 ‘저기가 내가 태어날 행성인가? ’라고 묻고 있는 것처럼 커다란 눈망울로 지구를 마주 보고 있다. 이렇게 존재의 시작을 표현하는 듯한 공상적인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나는 시공의 차원을 넘어선 여행을 영화와 함께 한다.
1977
할머니께서 꿈을 꾸셨다.
아주 커다란 거북이를 타고 부처가 넓은 바다같은 물을 건너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는 나를 가지셨다. 나의 태몽을 꾸신 것이다.
우주를 여행하고 있던 내가 그렇게 거북이를 타고 이 지구에 오게 된 건 아닐까?
나의 여행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뭐 어떤가. 흔한 말로 여행이란 개인의 신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 않든가. 아님 말고. 굳이 그 거북이가 커다란 부처의 손으로 변하더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하지 않더라도, 할머니의 신실한 불심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발현된 것이겠지. 그저 나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그 이야기를 같이 한번 상상해 본 것일 뿐. 거북이를 타고 우주에서 지구로 오는 정기. 그런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내 여행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런 상상을 바탕으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여행의 이야기도 만들지 않는가.
2029
고대의 바실리카와 같은 커다란 박물관. 그 거대한 공간에 부서진 기계 덩어리가 떨어져 있다. 인간을 닮은 그 기계 덩어리와 정보의 네트워크에서 생성된 프로그램이 만남을 시도한다. 새로운 존재 방식의 출현이다. 21세기가 시작되고 한 세대가 흐른 2029년, 인간의 기억과 의지까지 조작하는 천재 해커와 사이보그 테러진압 부대 간의 대결을 그린 1995년 일본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절정이 되는 장면이다. 그 기계 덩어리는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의 파편이다. 몸의 대부분은 사이보그로 되었으며, 그녀의 전뇌는 지구상의 어떤 컴퓨터와도 접속할 수 있다. 그녀와 융합을 시도하는 인형사. 인격체라 할 만한 이 프로그램은 네트워크에서 생성된 새로운 존재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해킹하여 인형조종사라는 즉 인형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사이보그와 네트워크를 돌아다니던 프로그램의 융합을 통해 탄생한 존재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자, 어디로 갈까... 네트워크는 방대하니까......
생산. 살아 있는 것들은 자신의 종을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복제를 한다.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면 번식일 테고. 정보의 관점으로 보면 기억이다.
"나는 절대 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다른 이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나 자신을 기억할 수 있다. (......) 나의 순간은 무리의 순간이며 나는 무리를 통해서만 나 자신을 기억할 수 있다."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철학자 와 늑대', p.334
여행은 이 생산에 기여한다.
생산은 독자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기계들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벌은 꿀을 얻으며 꽃가루를 옮기고 기계는 인간을 통해 업그레이드되고 양산된다. 인간은 타인을 만나 생식을 한다. 그런데 꼭 그것 만을 위해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만남은 정보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원하는 것. 즉 다른 사람의 기억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 욕망은 한정된 공간에서 일정한 패턴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이리로 저리로 횡단하고, 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을 포용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그래서 여행을 한다. 내 의지대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만나고 싶은 이를 만나기 위한 것 같지만 어쩌면 타인이 나를 더 많이 보게 하고 만나게 하는 것. 그것으로 자신에 관한 기억을 재생산하게 하는 것, 그 재생산의 네트워크를 넓히고자 하는 것, 그것이 여행을 욕망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 예술과 문학 활동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이제 인간은 물질적 신체를 벗어나 프로그램과 융합된 존재로 방대한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여행한다.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개체에서 사이보그라는 기계로, 또 그 기계에서 정보라는 존재로, 그 형식이 바뀌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생산 방식으로 무거운 백팩도 트레킹화도 필요 없이 방대한 네트워크를 돌아다니는 새로운 차원의 여행을 상상하게 한다.
2011.01
6개월을 계획하고 떠났지만 369일이 지나서야 우리는 다시 돌아왔다.
돈을 벌 수 있었다면 더 오래 여행을 했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여행에서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 당시에 나는 마뜩지 않았다.
무엇이 떠난 것이고 무엇이 돌아온 것일까? 제법 긴 시간을 여행하고 나니 그것조차 별 의미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베를린에서 서울 망원동으로 그냥 또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일상의 시간보다는 짧지만 온전한 나로 더 살 수 있던 여행을 기준으로 한다면, 내 것 아닌 욕망의 용광로에 노예처럼 내 시간을 그 연료로 쉴 새 없이 삽질해 퍼 넣는 일상의 삶은 진짜 나에게서 떠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도 사소하고 작은 것에 여행에서 느꼈던 기쁨들을 느낀다면 완전히 돌아온 것도 아니다.
이런 혼란의 상태가 계속될 뿐이다.
무언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은 이상적인 관념일 뿐.
현실의 삶은 이런 저런 일들과 아무런 목적 없이 마주치는 시간들로 채워지는 것 아닐까? 나는 언제 다시 떠날지 모르지만, 그것도 정해져 있지 않기에 지금 집 앞 슈퍼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듯 여행을 마주할 수도 있다. 언제 다시 떠날지 모르기에 언젠가 어디선가 여행은 내게 다시 한 번 씨익 미소 짓는 얼굴을 내밀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모든 마주침은 우발적이다. 그 기원들에서 그러할 뿐 아니라(마주침은 보증되어 있지 않다) 그 효과들에서도 그렇다. 달리 말해, 모든 마주침은 비록 일어났지만,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의 가능한 무가 그것의 우발적인 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해 준다."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알튀세르 저, 서관모, 백승욱 편역, ‘철학적 맑스주의’ p.78
모든 여행은 우발적이다. 여행 중에 마주치는 사건들 또한 그 우발성을 여행 밖에서 보다 더 실감하게 한다. 우리가 비록 여행의 루트를 미리 계획하였거나, 만날 사람들과 약속을 하였다 하더라도, 여행의 순간들 마다 그것들은 유연하게 무너지곤 한다. 하나의 풍경에 매료되어 계획보다 며칠 이상 더 머물게 되기도 하고, 여행 중에 만난 친구로 인해 전혀 계획에 없었던 도시를 방문하기도 한다. 물론 짜여진 일정대로 착착 진행하는 여행을 하기도 하겠지만, 여행에서 그런 방향성이 일상적인 삶에서보단 훨씬 약해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우발성을 바탕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여행을 영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마주치는 여행들을 어떤 표정으로 맞이해야 할까?
플라톤이 인간을 동굴에 가두어 버린 이래로 우리는 우리가 아닌 어떤 완벽한 존재가 있다고 믿고 우리 삶은 불완전한 것이며, 그 완벽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어떤 목적을 정해놓고 그것을 성취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거기서 불행은 시작된다. 이 사회가 그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있기도 하다. 이전의 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남들 보다 더 모으고 한 발이라도 더 앞서 나가야 한다고 똥줄이 타게 달리고 있다. 그런데 여행은 그 경쟁의 트랙에서 갑자기 멈춰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 눈을 판다. 먼 산을 바라본다. ‘어, 저기 재미있겠는데!’라고 가보는 것이다. 거기에 가봤더니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괜찮다. 무언가 봤다면 그만큼 삶의 지평이 넓어진 것이고, 보지 못했다고 해도 그만큼 삶의 지평이 넓어진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벗어나는 것. 목적을 없애는 것. 하나의 방향에서 벗어나도 우리의 삶은 지속된다. 다시 돌아오더라도 다른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자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다른 것들과의 만남을 생산하는 것. 내가 사는 이 곳에도 비가 내리지만 저 바다에도 황무지에도 비가 내린다. 존재는 하나다. 오로지 차이만 있을 뿐이다.
왜 여행을 했는지는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 의미는 여러 관계 속에서 어떤 구조에 따라 한계를 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행을 무한히 자유롭게 놔두고 싶은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겸연쩍게도, 다시 한 번 왜 여행을 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지만, 굳이 그 의미라고 한다면 오히려 여행이 어떤 나를 발굴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 여행을 통해 내게 만들어진 생각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여전히 알 수 없는 여행에 살짝 의미를 부여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이 지금 일상에 툭 던져놓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수집하는 것. 오늘 마당에 비가 온다면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 비와 함께 내렸을지도 모르는 여행 한 방울을 떠올려보는 것. 여행, 상상 그리고 일상이 만나는 시간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 그 곳에서 나의 삶과 이야기들을 엮어보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언젠가 우리는 마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이미 서로 다른 어딘가에서 같은 여행의 빗소리를 들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