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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Mar 09. 2017

파란 하늘 까마귀

파랑새 탈출기

이 도시에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 새벽녘 집으로 가는 택시 밖으로 펼쳐지는 찬란한 야경. 영생을 꿈꾸는 그 아름다움은 하나의 조명에 갇혀 일하는 야근자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겠지. 아! 죽을 수 없는 자들의 눈빛! 모두가 그 속에서 꿈, 희망, 행복을 이야기한다. 당신 바로 옆에 꿈이 있어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죠. 희망을 품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한 날이 당신 앞에 펼쳐질 거예요. 어디서든 꿈과 용기를 가진다면 아프지 않아. 아파도 멋진 인생이야. 지금 너의 일을 사랑하렴. 피할 수 없다면 즐겨. 이런 말들로 인해 이 깊은 밤에도 불빛들이 밝게 빛나고 있다. 그 밝음,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처럼 박제된 밝음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다. 꿈꾸기에 모자란 서너 시간이 나도 모르게 흘러가 버렸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날들이 내 감각을 야금야금 삼키고 나의 몸은 썩지도 않을 것 같다. 편의점 가공식품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내 생의 마당에서 죽음이 앉아있을 자리도 사라지고 있었다. 죽음이 사라진 삶은 얼마나 무감각한 것인가. 이 사회는 진지함으로, 공포와 금기로 죽음을 생의 저 밑에 감춰 놓았다. 무균처리 진공 포장된 삶이다. '인체에는 무해하나 먹지 마세요.'

 

여행을 다녀온 후 넉 달이 지나, 나는 다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매일 지리멸렬한 야근과 철야 작업이 끊이지 않았다. 여행 전의 생활과 다름없는 삶이었다. 그 속에서 여행의 경험이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 역시 섣부른 생각이었다. 그것은 직장인으로서 내가 가진 여행에 대한 보상심리였을 뿐, 여행자로서의 내게 미안해야 할 생각이었다. 일상의 볼모로 여행을 붙잡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여행은 일을 위한 건축기행도 아니었을뿐더러 날 갉아먹는 이 삶과는 완전히 다른, 그러나 종착점이 어딘지도 모를 방향으로 펼쳐진 것이었다. 여행과 같이 내 생을 향유할 시간은 그 후에 다시 시작된 일상 위에는 없었다.


다시 출근이다. 아침은 늘 후다닥. 무거운 발걸음. 지하철역으로 간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지하철에서 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지하철을 탄다. 밀리고 밀려 반대편 문에 붙어버렸다. 어두운 지하철 창문에 얼굴이 흐릿하게 비친다. 기차가 옥수역 가까이 지상으로 나오자 창문에 비친 얼굴이 사라진다. 한강을 건넌다. 지하철 문에 붙어 아래를 바라본다. 휙휙 지나가는 동호대교 주황색 구조물 사이로 한강이 보인다. 짙은 잿빛 한강이 일렁인다. 아침인데도 강물이 어둡다.

             

억지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내리는 방향의 문으로 갔지만 문이 열리자 내가 내리기도 전에 우르르르 타는 사람들이 앞에서 나를 친다. 내가 내리기도 전에 우르르르 내리는 사람들이 뒤에서 날 친다. 떠밀려서 열차에서 내린다. 나를 치고 가는 사람들이 우르르르 계단을 올라간다. 고개를 숙인 채 자기 발 앞에만 보고 올라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마치 죽어도 죽지 못하는 좀비들 같다. 압구정역 4번 출구 계단을 힘없이 올라가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청명한 하늘이 파랗게 반짝인다. 그런데 지하에서 방금 올라온 땅 위가 어찌 된 일인지 너무 어둡다. 눈을 몇 번 꾹 감았다가 떴다 했지만, 여전히 땅은 어두웠다. 점점 땅거미가 멀리 퍼졌다. 그러고 보니 동호대교를 건널 때 보았던 한강에도 커다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비치는 것 같았는데 구름이겠거니 했었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하늘은 찬란한 파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눈을 찌푸리고 더 자세히 보았다. 하늘이 너무 낮다. 맑고 파란 하늘이라면 높고 높아야 할 텐데 하늘이 너무 낮다. 그리고 지지직 노이즈가 떨리고 있는 티브이 화면처럼 보였다.

    

저게 뭐지?

    

새다!     


길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새였다. 파랑새. 무수히 많은 파랑새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수백만 마리 아니, 수천만 마리는 될 것 같았다. 윤기 나는 파란 깃털이 밝아 보였지만, 빽빽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파란 장막이 햇빛을 가려 땅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하늘은 낮처럼 파랗고 땅은 밤처럼 검은 것이 현현한 마그리트의 그림 같았다. 새의 무리는 어딘가를 향해 날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젖은 백지에 파란 잉크가 퍼지듯이 수많은 파랑새가 커다란 움직임을 만들며 하늘에 점점 퍼지고 있었다. 땅에 깔린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햇살은 점점 더 멀리 소실점을 향해 도망치고 있었다.


빼액 빼액 경보음이 울린다. 폰을 확인했다.

    

[재난 경고 문자]

외출을 삼가시고 직장 및 가정에서 일상생활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1. 외출 후 손 씻기

2. 청결유지

3. 감염예방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국가안전처*     


하나 마나 한 얘기만 하고 있다. 손 씻는 것과 하늘에 파랑새 떼가 뒤덮고 있는 것이 무슨 긴밀한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냥 가만히 처박혀 있으라는 건가?    



           


여전히 파란 하늘이다.

파랑새떼가 아직 하늘을 덮고 있다.

정부가 추산하길 서울을 덮은 파랑새가 약 오백십육만 마리라고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들의 추산은 짜다. 누가 봐도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몇십억 마리는 될 것 같았다. 낮아진 하늘 탓에 공기가 아주 탁했다. 햇빛이 들지 않으니 모든 게 시든 것 같다. 나무나 풀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정부에선 아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구글 어스를 분석한 어떤 사람은 파랑새떼가 서울 북악산 자락 어디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고 그 근처에 사는 대통령은 벌써 도망친 지 오래라는 소문도 들렸다.          


오늘 아침 가장 큰 뉴스는 잠실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재벌들이 제2 롯데월드 타워 꼭대기로 대피했다는 (파랑새의 장막 위까지 올라가 있으므로 유일하게 햇빛이 들고 비상용 헬기가 뜰 수 있다고 했다) 정보가 SNS를 통해 퍼졌고, 괘씸하게 여긴 일부 사람들이 시위을 하기위해 그곳으로 몰려들기도 전에 타워가 무너져버렸다는 소식이었다. 모두가 유튜브를 통해 석촌호수에서 물기둥이 솟고 타워의 파편들이 검은 먼지 구름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했다. 경호와 통제 때문에 텅 비어 있던 타워가 저세상으로 데리고 간 것은 결국 재벌일가들뿐이었다. 무너진 이유가 싱크홀 때문이라고도 하고 파랑새 때문이라고도 했다. 원래 높은 마천루는 바람의 영향에 대응하기 위해 조금씩 흔들리게 설계되는데 파랑새 때문에 그 역학적 변위가 예측된 상태를 벗어나서 그렇다는 분석도 나왔다. 어떤 음모론자들은 이게 모두 트위터(단지 로고가 파란 새라는 이유로)를 통제하려는 국가정보기관의 공작이라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악취였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한 번씩 하늘에서 아니, 파랑새들 밑에서 똥이 비오듯 떨어졌다.

온 누리가 새똥으로 뒤덮일 지경이었다. 고약한 냄새의 시뻘건 새똥이었다. 처음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때부터 정부는 성분 분석기관 선정 문제로 스캔들을 일으켰고. 엉뚱하게 보건부 장관이 해임되고 대기업 의료원이 전문기관으로 선정되었다. 그들은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말로 기자회견을 끝냈다. 아니, 우산을 휴대하라고 했던가?

 

              


좀 더 지켜볼 일이 아니었다. 커리어 안에 있는 백팩 두 개를 꺼냈다. 떨어진 데는 없나 살펴봤다. 주머니 안에 있는 방수커버를 꺼내보니 5년 전 여행에서 묻은 먼지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낡아서 찢어진 곳은 안쪽을 은빛 테이프로 붙였다. 짐을 챙기다가 창문에 골목길 보안등을 가린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나무가 보고 싶어 마당으로 나갔다. 나무를 한참 올려다봤다. 대문 위에서 고양이가 나와 담장을 따라 도망간다. 고양이한테 '안녕.' 인사하고 다시 마당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하얀 벽에 밝은 빛 조각이 하나 붙어 있다. 빛을 비추는 곳을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파란 하늘에 하얗게 밝은 구멍이 하나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구멍에서 순간 검은 물체가 낙하하듯 다가왔다.


뭐지?     


까마귀였다. 위엄 있는 검은 날개를 접으며 감나무 위에 앉았다. 은빛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이 목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뾰족한 부리에는 파란 깃털이 물려 있었다.

까마귀에게 물었다.

     

누구냐? 가루다? 삼족오?

     

까마귀는 날개를 한번 퍼덕이며 나무에서 내려와 마당에 앉았다.   

  

엉뚱한 신화에 나를 집어넣지 마라. 난 너의 기억이다. 너의 꿈이다. 넌 나를 본 적이 있다.


골똘히 기억을 더듬자 여행에서 만났던 까마귀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녔다.


그렇구나! 너구나. 박타푸르……. 쓰레기 더미 옆에서 새를 잡아먹었던 그 까마귀.

그래 네가 파랑새를 죽였구나. 저기 하늘에 빛이 새어 나오게 한 게 바로 너구나.


아니, 내가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 이제 떠날 준비는 되었는가?

    

까마귀의 짙은 눈동자가 물속에 있는 검은 돌멩이처럼 반짝였다.




오빠! 티켓 구했어!


떠날 준비를 했다. 등산화에 구두약을 발랐다. 방수 보강 대책이다. 지퍼백에 옷을 넣고 압축시켜 배낭에 넣었다. 침낭도 챙겼다. 낚싯줄, 칼, 물병, 물을 끓일 수 있는 일명 '돼지꼬리', 손전등, 라이터 등이 배낭에 들어갔다. 집에 있던 참치 캔과 배즙, 홍삼즙도 몇개 챙겼다. 아내와 나는 각자 커다란 백팩을 매고, 히말라야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썼던 판초 우의를 뒤집어썼다. 아내가 자신의 등산화 끈을 조이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자 가좌역 가좌!


꺄아~! 이 상황에 아재 개그!

 

썰렁한 농담에도 리액션이 좋은 아내다.

      

잠깐 나 화장실 좀…….


아내는 별말 없이 기다려줬다.

어딘가 나가기 전에는 화장실을 가줘야 마음이 편하다.

     

오케, 이제 진짜 가자!


띠링,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떠날 수 없는 현재의 삶은 변함없이 연속되는 충실한 삶 속에 행복이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그 일상에서 벗어나면 도태되고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 삶에서 어떤 목적이나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한우물만 파야 한다는 강박감이 내면화되어 있는 사회. 남들처럼 공부하고 학교에 가고,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직장을 다니고. 다른 사람이 심어준 파랑새의 깃털 같은 것들을 모으며 산다. 그 속에서 '행복은 바로 당신 곁에 있어요.'라는 말은 한눈팔지 말고,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역할만 충실히 하라는 통제의 말을 주입하기에 더없이 좋은 사탕발림 아닌가. 게다가 그렇게 한들 남들처럼만 사는 것조차도 더 힘든 세상이 되어간다는 것도 까맣게 잊게 한다. 출산장려정책이 노동력 착취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현실인데 말이다. 여성을 비인간적인 생산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군소리 없이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커서 또 똑같은 일을 한다. 시시포스의 돌을 대물림하며 살고 있다. 왜 산에 올라가고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그러나 잠깐 비켜서 생각해보면 우리 위에는 파랑새뿐만 아니라 까마귀도 함께 날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른다. 모르면 어떤가. 어차피 생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뒤엉켜있는 곳이다. 일단 움직여 보는 것이다.

         

떠나 본 자들만이 알 수 있다.

파랑새가 집에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틸틸과 미틸이 집을 떠나 온갖 모험을 한 후, 돌아와서야 파랑새는 바로 집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몰랐다. 그들이 떠나 보지 않았다면 파랑새가 바로 집에 있었다는 것을 영영 알아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떠나 보아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고, 파랑새 따위 어쩌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모두가 파랑새를 찾지만 내게 더 중요한 것은 파랑새가 아니라 까마귀일 수도 있다는 것. 떠나 본 자들만이 파랑새가 아닌 다른 것도 있다는 걸 인식할 수 있다.


공항으로 가는 전철 안이 생각보다 한산했다. 공항에서 5년 전 여행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이미 인도 북부 히말라야 위의 도시 레에서 이런 재난상황을 함께 겪은 적이 있던 사람들이다. 공항 전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직도 보통의 분위기와 달라진 게 없었다. 한 번씩 후드득 시뻘건 새똥이 떨어질 뿐이었다. 이제는 거기에 놀라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파랑새 밑의 세상에서 그냥 살기로 한 것일까. 전철도 아무 이상 없이 공항을 향해 달린다.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없을지는 가보면 알 것이다. 레의 까마귀들이 다시 모일 것이다. 아니면, 또 다른 까마귀들이 더 모일 수도 있겠지. 가봐야 알 수 있다. 일단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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