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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Mar 07. 2017

여행이 이야기를 만든다 1

여행을 떠난 이유


"비가 온다.

그러니 우선 이 책이 그저 비에 관한 책이 되기를.

말브랑슈는 "왜 바다에,  큰길에, 사구에 비가 오는지" 자문했다.

다른 곳에서는 농토를 적셔 주는 이 하늘의 물이 바닷물에는 더 해 주는 것이 없으며 도로와 해변에서는 사라져 버리기에. 하늘이 도운 다행한 비이든 반대로 불행한 비이든 이러한 비가 문제인 것은 아니리라."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알튀세르 저, 서관모, 백승욱 편역, ‘철학적 맑스주의’ p.35     



나는 왜 여행을 한 걸까?

여행하는 내내 나는 내가 왜 여행을 하는지, 여행의 목적이 뭔지, 흔히 이야기하는 콘셉트가 뭔지 생각해본 적이 많았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 스스로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서 떠난 것도 아니었고, 전공분야로서 건축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성과나 경험을 쌓겠다는 야망(?)도 없었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나의 삶이 완전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여행을 할까? 왜 파종한 대지도 아닌 황무지에, 드넓은 바다에, 큰길에 비가 내릴까? 가지 않아도 될 곳으로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날까?

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여행의 기원, 여행의 계보? 이러한 불확실성의 평면 위에서 오히려 여행이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의 손에 펜을 쥐여 주는 것 같았다. 

       


약 B. C 900년 전     

 오, 시의 신이여! 그 옛날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멀고 험한 귀향의 길을 정처 없이 헤매던 한 영웅의 이야기를 들려주소서. 그는 수없이 많은 도시와 거칠은 산야, 험한 바다를 횡단하며 끝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약 이천 구백 년 전 호메로스는 그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이렇게 시작한다. 서구 문학의 원류라고 할 만한 작품이 바로 여행 이야기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오디세우스가 겪은 10여 년간의 귀향길. 그 속에서 겪었던 온갖 모험과 시련들을 펼쳐놓은 것이 ‘오디세이아’ 인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여행의 끝이 시련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몇 해가 지났다. 드디어 하늘의 여러 신도 이제는 그를 고국 이타케 섬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다만 고향의 가족에게 돌아간 후에도 당장에 모든 근심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고통을 겪도록 정해 놓았다." 여행이 끝이 아니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2009.9

휴대폰이 진동했다.

묵직한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가을 오후의 허전한 공기가 복도에 맴돈다.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그 허한 기운이 느껴진다.     


오빠 더는 못 하겠어…….


아내였다.

직장생활에 극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 우짜노…….

그만둬.     


그만두라고 했다. 사는 거야 내가 벌면 입에 풀칠이야 못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빠 우리 여행 가자. 


아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음……. 그래, 그런데 어떻게 가지, 돈은 얼마나 들까?

     

아내가 말하는 여행이 잠깐 관광을 즐기다 오는 정도의 여행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아내는 여러 번 장기 여행의 꿈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 우리 방법을 한번 생각해보자.     


전화를 끊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컴퓨터 모니터는 일이라는 광선을 내게 줄곧 쏘고 있었지만 나는 한 개도 받아내지 못하고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여행을 갈 수 있을까? 회사는 어떻게 그만둘 것인가? 돈! 돈은 어떻게 구하지?


머리에는 온통 이 생각만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내의 절실함이 내 피에 섞여 심장으로 타고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서늘한 긴장감이 뒷골을 급속 냉각시키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몇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갑자기 내 몸을 작동시키는 기계가 자동으로 시동이 걸린 듯했다. 비자발적인 적극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알기도 전에 나의 뇌는 손가락에게 아내의 번호를 누르라는 명령을 전달하고 있었다.

  

응, 난데……. 너 대출받을 수 있지 않나? 회사 그만두기 전에 직장인 대출을 받고 그걸로 여행 가면 몇 개월 길게 갔다 올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전세자금 대출은 다 갚았으니까 대출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다음 달,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물론 그만두기 전에 직장인 대출도 받았다. 결정을 내리고 나자 우리는 휴면 상태였던 우리 몸의 여행 기계를 척척 가동했다. 마치 전에도 운전해 본 것처럼. 그렇게 여권, 비자, 여행용품 등을 틈틈이 준비해 나갔다. 내가 프로젝트의 스케줄 때문에 12월 중순이 되어서야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고, 처남의 결혼으로 우리 일정은 조금 더 늦춰졌다. 마침내 1월 7일, 우리는 두꺼운 코트를 입고 각자 커다란 백팩 하나, 보조 가방 하나씩 앞뒤로 매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공항철도를 탔다. 몇 시간 후면 찌듯이 무더운 방콕에 있게 될 테지만, 공항으로 가는 열차 창밖에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대지가 복사기로 들어가는 도면용지처럼 쉭쉭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상관없다. 건축도면은 누군가 그리겠지. 

이제 나는 떠난다. 이제 나는 떠난다. 그래, 나는 이제 떠나는 거다!


왠지 익숙한 떠남의 흥분이 가슴 한가운데에서 보글보글 끓는 게 느껴졌다. 

이 익숙함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아니, 이 흥분의 감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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