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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Mar 06. 2017

동네 산책하다가 글을 쓰게 되었다.

상상으로 가는 길에서

퇴사하고 아무것도 안 했다. 퇴사를 하려면 무언가 계획을 세운 후에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퇴사는 놀기 위한 퇴사였지 일하려고 하는 퇴사가 아니었다. 무계획이 계획이었다(여행도 그런 식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쉼표가 있어야 했다. 아니 마침표. 마침표 뒤에는 여러 가지 문장이 올 수 있으니까. 마침표를 찍은 다음의 문장은 마침표 뒤의 내가 담당할 몫이었다.


하루에 내가 하는 일이라곤 아침에 아내를 바래다주고 동네 한 바퀴 걷는 것이었다. 걸으면서 쉼표로 해야 할지 마침표로 해야 할지 생각을 했다. 쉼표라면 조금 일을 쉬다가 다시 같은 직종의 일을 구하는 것이었고, 마침표라고 한다면 다른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없었다. 남들이 본다면 대책 없는 잉여 중년으로 여겨졌을 테다. 이 나이를 먹도록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그걸 하나 모른다는 게 조금 답답했지만, 그냥 흘러가도록 두었다. 일단 그냥 놀고먹는 게 먼저였다.


동네 구경이나 하자.


생각을 털어버리고 어슬렁어슬렁 만보객이 된다.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 건축설계 직업병이 도진다. 저긴 마감을 왜 저렇게 했지? 저 외장재는 뭐지? 유리 컬러를 왜 저걸로? 공사비 줄이겠다는 심산이었나? 오, 매스가 좋은데. 내부가 궁금하군. 혼자 건물 평을 하며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하루는 걷고 걷다 보니 연남동에서 홍대 로데오 거리까지 갔다. 상상마당 건물이 보였다.


도대체 외관을 왜 저렇게 했을까나?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불현듯 생각이 건축 밖으로 탈출했다.


아! 여기 여행작가 글쓰기 강좌가 있었지!


얼마 후 수강 등록을 하였다. 동네 산책에서 우연히 글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완전히 우연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여행 후에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여행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처음은 여행에서 겪었던 일 중에서 말하기가 망설여지는 아픈 기억을 써냈다. 그렇게 해야 앞으로도 쓰기 쉬울 것 같았다. 첫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진솔하게 자신을 던져놓을 때 글에 힘이 생긴다고 했었고 나 또한 그 말에 공감했다. 나는 내 상처를 드러내는 것으로 그 힘을 얻고자 했다. 고작 A4용지 반 페이지를 쓰는데 저녁부터 새벽까지 걸렸지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매주 수업이 기다려졌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다음 시간까지 쓸 이야기들이 머릿속 이곳저곳을 들락날락했다. 강제성 있는 숙제도 아니었는데 매주 글을 썼다. 분량도 점점 늘렸다. 다른 이유도 없이 글쓰기 자체가 재미있었다.


여행은 두 가지 차원에서 변화한다. 첫째로 여행지의 날씨, 장소, 사람 등 수많은 경험의 요소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여행을 누구도 똑같이 다시 할 수 없으며 타인의 여행기에서 읽은 것을 내 여행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다. 두 번째로 여행은 내 안에서도 변하고 있다. 여행의 기억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그 순간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다. 현재 나의 경험이나 지식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따라서도 여행은 변한다. 그러므로 나 또한 내가 한 여행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


첫 수업 시간에 들은 말

 '있는 그대로 쓰는 글은 없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했었는지.


여행기는 여행에서 태어난 여러 생산물 중 하나이다. 부모 자식도 생김새나 성격이 다른데 하물며 여행과 여행기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여행은 기억과 꿈에서 자꾸 변신하는데, 여행기라고 해서 내가 겪은 그대로의 경험만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쓰기 싫었다. 사실적이고 정보성이 중요한 글이라면 나보다 실용적인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훨씬 더 좋은 글을 생산해 주리라. 그렇다고 반대로 내가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핍진성 같은 어려운 말과 뜻을 제대로 알고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 안에서 변해가고 있는 여행을 쓰고 싶었다. 책이나 영화가 여행과 손을 잡았고 내가 꾸었던 꿈이 여행의 기억과 섞였다.

여행은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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