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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Apr 03. 2017

하얀 게 좋아 2

여행의 빛과 그림자

하아품. 푹 자고 나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속소 1층 카페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파란 유리컵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 두었다. 

밖으로 나오니 날씨도 좋고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다. 팔랑거리는 민소매 원피스도 오늘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새벽에 보지 못했던 파묵칼레의 하얀 언덕이 저 멀리 보였다.  

             

매표소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만 했다. 파묵칼레의 석회질 표면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하는 방침이었다. 굳이 그걸 위해서가 아니라도 맨발이 훨씬 좋았다. 매끈하면서도 수많은 주름이 겹쳐져 있는 표면이 마치 고양이 혓바닥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하얀 그 표면에는 맨발이 더 로맨틱했다. 


올라가는 길 왼쪽으로는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업무에 열을 올리는 회사원처럼 기울어져가는 

태양이 강렬하게 자신의 몸을 빛내고 있었다. 

그 반대편으로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푸르스름하게 핏줄이 도드라진 발이 있다. 발의 그림자도 두껍게 나타나서 그림자의 발등은 더 높아 보였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다 왼쪽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림자는 발목에 가려져 카메라 앵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석회 주름들과 함께 가지런한 맨발이 아르누보 양식의 회화 같았다. 


찰칵. 


천천히 올라가며 민트빛 온천수에 발을 담가보기도 했다. 


찰칵.


파묵칼레의 찬란한 바닥을 한참 거닐다 히에라폴리스까지 올라갔다.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을 향하고 있었다. 

원형 극장에서의 선셋을 감상하는 게 좋다는 걸 검색을 통해 알았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무대에서 시작해 한단 한단 관람석 스탠드를 올랐다. 해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뒤편 관람석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담장 너머의 연인을 더 오래 보기 위해 발뒤꿈치를 한껏 올리는 가련한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스탠드에 붙어있는 그림자가 지그재그로 일그러져 있었다. 

           

제일 높은 곳에 도착해서야 관람석에 앉아 해를 바라보았다. 

바로 폰을 꺼내 카메라를 터치했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 해가 멋지게 카메라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두운 극장에 노출을 맞추면 너무 밝아서 해가 사라졌고 밝은 하늘에 노출을 맞추면 극장을 비롯해 가까운 풍경이 어두워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일단 하늘에 초점을 맞추고 밝기를 조정했다. 

됐다. 이제 인스타에 올려야지. 

뒤에서 또 성가신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넌 저런 풍경을 앞에 두고 또 카메라만 들이대니? 그러지 말고 저 그림자들이 만들어내는 형상들을 봐. 저 무대의 기둥과 조각들을 보라고. 저게 바로 우리 그림자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이라고.'


해 질 무렵이 되니 이놈의 그림자도 덩치를 키우고 목소리에 더 힘을 싣는다. 못 들은 척했다. 어차피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면 곧 사라질 녀석이다. 

              

인스타그램을 터치한다.

하트를 터치해서 오늘 내 소식을 본다.

친구가 카파도키아 사진을 '좋아요.' 하였고, 잠들기 전 올렸던 셀카에 여러 팔로워가 '좋아요'를 했다.


1. 가운데 + 버튼을 터치, 카메라 롤로 들어가서 사진을 선택한다. 다음.

2. 필터를 선택한다. '발렌시아'가 석양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다음.

3. 설명을 쓴다.


#터키 #파묵칼레 #히세아폴리스 #sunset #하늘

#여행 스타 그램…….이라고 썼다가 지운다. 

무슨 '~스타그램'이라고 하면 좀 없어 보인다고 할까? 

대신 #travel이라고 쓴다. 다음.


4. 태그 할 사람이 없어서 좀 아쉽지만, 마지막으로 공유하기를 터치한다.


홈으로 간다.

저절로 손가락이 화면을 위로 쓱쓱 올린다.

팔로잉 사진에 좋아요를 몇 번 눌러주는 사이 

내 소식 하트에 숫자가 솟아올랐고, 해는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아 버렸다.

해지는 순간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인스타 안에 석양은 계속 빛날 테니까.


                  


어둑어둑해진 길을 내려와 다시 파묵칼레에 들어섰다. 

밤에 보는 파묵칼레의 경관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노랑, 파랑, 보라색 등의 조명이 하얗던 파묵칼레를 다채롭게 물들이고 있었다.

비누 거품 같은 석회붕의 장막이 조명을 받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먼 풍경을 가득 채운 어둠이 조명등을 넘어, 깊은 그림자로 파묵칼레의 솜 같은 벽에 침투하고 있었다. 

내려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림자를 파묵칼레의 주름들 위로 길게 늘어뜨렸다. 

그림자는 조명에 따라 옅어지기도 하고 진해지기도 했고, 어느 순간에는 두 개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조명 가까이에서 색다르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눈을 돌리니 그림자가 바닥에 엎드려 거품 같은 벽으로 몸을 늘어뜨리는 게 보였다. 


'또 고리타분한 말을 꺼내겠지.'


그러나 그림자는 아무 말이 없다.

    

먼저 말을 걸려다 말고 조명에서 멀어져 석회 벽으로 갔다. 

그림자는 벽을 기어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비스듬하게 다시 바닥으로 내려오더니 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까 또다시 벽을 타고 일어섰다. 조명과 그림자가 이루는 각이 비스듬했던 탓이었다. 비스듬한 연장선 가운데 가만히 서 있으니 그림자가 나를 향해 돌아보는 것 같았다. 그림자를 둘러싸고 있는 붉은 듯 푸르른 빛이 왠지 서글퍼 보였다.


사진을 찍으려 하자 벽을 따라 일렁이던 그림자가 손을 살짝 들었다.


못 본 척 그림자에게서 뒤돌아섰다. 그러나 그림자가 먼저 내게서 뒤돌아선 듯했다.               


'바이... 바이...'


그림자의 사그라드는 음성이 들렸다.


찰칵.     

  

그림자가 사라지니 사진 속 얼굴의 윤곽도 희미하다. 희멀건 셀카를 찍고 그림자가 기어오르던 벽을 애써 외면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늘 곁에 누군가 있는 듯한 낌새가 지금은 없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명에 눈이 부셔 질끈 감았다. 검은 눈앞에는 금붕어 같은 점들이 헤엄친다. 다시 눈을 뜨고 바닥만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발밑에 얕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투명한 물 밑에는 그림자가 물과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파묵칼레가 시작되는 출입구가 가까워졌다. 거기엔 조명이 없어 어둑어둑하였다. 어둠 속으로 더 빨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하얀 성에서 벗어나자 사방이 어둠으로 채워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봤지만, 이제 시커먼 어둠 속에서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저 앞 길에 다시 불이 밝혀져 있었다. 

어둠인지 마음인지 

밝은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붙잡는 것만 같았다.

               





파스타 집을 나와서 친구는 맥주 한잔 하고 가자고 했지만, 배가 너무 부르다며 집에 가겠다고 했다. 거리엔 가로등과 간판 불빛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그저 모두 관계없는 다른 사람들의 일상으로 느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꺼내 보았다. 

인스타에 아까 찍었던 사진을 올렸다.

터치,터치...


 #연남동 #파스타 #맛스타그램 #인생_음식 #...


해시태그 뒤에 '그림자'라고 썼다가 잠시 멈춤. 

지웠다.


그랬다. 스마트폰의 발광하는 화면은 그림자가 붙어있지 않다.

그림자가 없는 그 화면에서 아늑함을 느낀다. 한 참 화면을 바라보다가 아니, 화면에서 퍼져 나오는 빛을 바라보다가 '공유하기'를 터치하고 고개를 숙인 채 발걸음을 옮겼다. 

지구 밖에 있는 별들보다 여기 이 안, 인스타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발광하는 화면 속 하트에서 숫자 1이 솟았다.

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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