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만난 사람
미얀마 돈은 정말 더러웠다. 돈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서 더럽다는 게 아니라 정말 지폐 그 자체가 더러웠다. 아웅 산 수지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오기 9개월 전, 우리는 바로 미얀마 양곤에서 환전을 하기 위해 '보족시장'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국제적으로 경제적인 제재를 받고 있던 미얀마는 현금인출기나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국가 중 하나였다. 오로지 현금 달러를 미얀마 화폐 '짯'으로 환전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화폐단위도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아서 몇 장의 달러를 바꾸면 두터운 현금 뭉치를 받아야만 했다. 게다가 언제 발행한 돈인지 궁금할 정도로 오래된 지폐는 때가 묻고 닳고 닳아서 너덜너덜할 정도였다. 이래저래 부담스러운 돈이었다.
환전할 때도 어디에서 하느냐에 따라 환율이 많이 달랐다. 처음 공항에서 양곤 시내로 들어오기 위해 운전사를 통해 환전했던 것이 1달러에 800짯이었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율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니버스를 타는 데 200짯, 시내버스로 갈아타서 400짯, 물 한 병에 200짯을 냈다. 그렇게 짯은 다 써버리고, 숙소비는 할 수 없이 짯이 아닌 달러로 계산했다. 미얀마에 들어오기 전 알아보았던 여행 정보에 의하면, 양곤에 있는 '보족시장'의 중국인 보석가게가 환율이 가장 높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족시장을 찾아 헤맨 날은 운도 지지리도 없지, 월요일. 매주 시장이 문을 닫는 날이었다. 결국, 근처에 있는 좀 번듯한 호텔에서 10달러를 9500짯으로 환전했다. 1달러에 950짯인 셈이다. 처음 환전했던 것보다 양호하다. 내가 물을 사 먹는데 200짯, 담배를 200짯에 사고, 아내가 물을 사 먹은 것은 300짯, 애플 주스는 1500짯. 숙박비는 12달러 달러로 계산, 같은 숙소의 여행자들과 마신 맥주도 달러로 3달러. 누더기 같은 짯에, 달러에, 환율에, 물가에. 우리는 갈팡질팡했다.
미얀마 돈은 골치가 아팠지만 사람들은 좋았다. 언제나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웃는 얼굴. 순박하고 친절한 사람들. 한류의 인기로 인해 어디서든 우리가 한국사람이라는 게 밝혀질 때면 나는 '오빠'라고 불리고, 아내는 '언니'라고 불렸다. 아내가 양곤의 쉔양지 파고다에서 만나 친하게 된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은 그 다음 날 같이 소풍을 가자고 했고 우리가 환전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도 했다. 처음 만난 외국인에게 어떻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줄까 놀라웠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놀라운 게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침 9시. 웨인양지 파고다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세 명의 여자아이들. 린린, 츠위, 이몬. 린린이 스물두 살, 나머지 두 명은 열여덟 살이라고 했다. 어제 이 곳에서 아내가 만나 오늘 같이 놀기로 약속을 한 현지 여성이다. 린린은 제시간에 왔지만 두 명이 늦는다고 했다. 40여 분이나 기다려서야 나머지 두 명이 도착했다. 수줍고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환전하기 위해 보족시장으로 같이 갔다. 그들이 우리가 환전하는 것을 도와준다고 했다.
아무래도 현지인과 같이 와서인지 시장에서 마음이 좀 편했다. 시장 사람들에게 그 친구들이 얘기하니까 조그마한 목욕탕 의자를 내어주며 기다리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누가 환전을 담당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진행이 되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돈다발을 든 아저씨가 나타났다. 린린이 얘기를 하더니 우리에게 말을 전해준다. 1달러에 1000짯. 여행 준비하면서 우리가 알아본 환율이 1달러에 1003짯 정도였으니 수락할 만 했다. 10달러짜리 30장을 건네주니 1000짯짜리 300장 돈다발이 두툼하게 손에 들어왔다. 린린은 먼저 돈을 받아서 직접 돈을 세어보고 우리에게 다시 확인하라고 건네주었다. 야무지게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마침내 미얀마에 들어온 지 3일이 지나서야 만족스러운 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