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기 Mar 28. 2017

젖은 것은 너무 무겁다 2

바라나시에서

할아버지 덕에 휴가를 나오게 되었다. 직계존속 사망 사유로 특별휴가를 받았다. 유격 훈련 입소 하루 전이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가장 잘해준 일일 것이다.


장례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치뤄졌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여동생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리 공주. 할아버지는 유난히 당신의 손녀를 공주라 부르시며 예뻐하셨다. 어떤 상황이든 할아버지 뒤로 숨으면 여동생이 이긴 것이었다. 그래, 울어라. 우리 공주, 넌 실컷 울어야 한다. 어머니도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부모님이 장례식을 위해 이것저것 하는 것 같았지만, 아직 조문객들이 오지 않은 시간이라 집은 고요하게 분주했다.


할아버지가 누워계셨던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병풍 뒤에 숨어계셨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들이 조문했고 몇 번인가 절을 했고 동생은 그동안에도 여러 번 엉엉 울었다. 언제 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친척들도 ‘아이고 아이고’ 잘도 곡을 하는데, 난 눈물이 나지 않았다. 좀 눈치가 보였다.  


입관을 했다. 방 한가운데 요가 깔려있었고 그 위에 할아버지의 주검에 놓여있었다. 생전에 할아버지의 요는 늘 방 윗목에 펴져 있었는데 같은 공간의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요가 낯설었다. 초등학교 때였지 아마. 학교에서 돌아와 ‘다녀왔습니다.’인사를 했다. 대답이 없다. 할아버지는 방 한가운데 요를 길게 펴놓고 모로 돌아누워 계셨다. 주무시나? 귀밑의 근육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아득 아득 소리가 났다. 난 이상한 할아버지가 무서워 가방만 던져놓고 놀러 나갔다. 그 날 할아버지는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뭘 잘못 드셨는지 위세척을 했다고 했다.


아빠도 엄마도 그날의 사건을 말해선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말로 나오지 않던 그 사건은 기억에서도 숨어 있었다. 그 후 할아버지 방에 있던 책장 서랍에서 농약 같은 것을 보았을 때, 할아버지의 입속에서 아득거렸던 소리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그것도 역시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득 아득 소리가 났던 그 자리, 그 요 위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두 손에 동전을 쥐어 드리고 입안에는 흰 쌀을 넣어드렸다. 할아버지의 야윈 얼굴이 바싹 마른 요 같았다. 염을 하는 장의사의 손을 따라 바스락거리는 하얀 천과 종이의 소리도 그랬고 나의 눈도 그랬다. 말라 있는 것들.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잘 우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장의사는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마지막 기도 대신 눈을 감고 물었다.


할아버지, 언제부터 죽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날 밤, 방 문 앞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천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이황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 할아버지 이황 닮았네.’라는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할아버지께 절을 드리기 시작했다. 일 배. 온몸을 웅크려 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허벅지에 스치는 아랫도리에 자극을 느꼈다. 이 배. 움찔하는 자극이 더 강하게 반복되었다. 삼 배. 사정했다. 눈을 떴다. 아직 방안은 컴컴했고 이황을 닮은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찐득하고 미끈한 감각이 꿈에서 건너와 있었다. 손이 뭍은 정액을 그냥 속옷에 슥 닦았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무반이 아니라서 낯설었다. 낯선 천장이 저 높은 곳에서 이마를 누르고 있었다. 일어날 수 없었다. 뻣뻣하게 마르기 시작하는 속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다. 눈을 감고 이불을 이마까지 올려 덮었다.

     

다음 날 아침, 장지로 출발하기 전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연기를 뿜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흘러갔다.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이 뽀송해 보였다. 하늘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고작 손자새끼 몽정에나 이바지 했을 뿐, 흘러가는 구름을 잠시 멈추게 하지도 못했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군대에 가버리면 할아버지는 어쩌나 싶었는데, 할아버지는 느려터진 구름처럼 엉금엉금 자기 시간을 흘러가게 하고 있었다. 내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갔던 것이다. 휴가를 나와 여전히 잘 살아계시는 할아버지를 보면 배신감이 느껴졌다.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은 그저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어쩌면 선택은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아닐까. 여전히 눈물이 나지 않았다. 눈물도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몸엔 물기가 얼마나 남았을까. 장지로 가는 마을에 도착하자 물 대신 상여의 종이꽃들이 할아버지의 몸에 무게를 보태어 주었다. 상여의 새끼줄 사이에는 이황이 그려진 지폐들이 꽂혔다. 선산에 다다른 꽃상여가 구름 가까이 흘러갔다.

  





카페에서 나와 송장이 지나갔던 골목길에 발을 디뎠다. 골목길을 따라 갠지스 화장터로 향했다. 골목길 양옆으로 화장에 쓰일 장작들이 빼곡히 쌓여 길을 더 좁게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죽음이 저 강으로 향하기에 이렇게 많은 장작이 있는 것일까. 조금 더 걷자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갠지스 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트에 앉아 화장터를 구경했다. 옛날 같았으면 충격적인 인도의 문화로 알려져 무언가 신비하고 독특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장소였겠지만, 이미 유명해질 만큼 유명해진 바라나시와 여러 매체를 통해 노출된 화장터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카페에서 들었던 운구 행렬의 만트라가 귀에 남아 여전히 울리고 있는 듯 했다.


화장터 위에 멀리서 흘러가는 구름의 속도가 눈길을 끌었다. 구름의 느린 움직임에 비하면 그 아래 일렁이는 화장터의 연기는 볼품없었다. 장작더미 위의 주검에서 활활 이는 불길도,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춤을 추듯 공중에 손을 휘젓고 있었지만, 느린 구름에는 닿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오줌으로 젖어있던 요 위에서 덩실덩실하던 나의 춤도 마찬가지였겠지.


화장터에는 오열하는 사람도 없었고, 고무된 눈빛을 촉촉하게 반짝이는 여행자도 없었다. 정수리 뒤에 꽁지머리만을 남겨둔 상주가 푹 파인 눈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행자들은 가트에 앉아서 불길을 멍하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른 장작, 마른 흙. 흐르는 강물도 건조한 공기에 아무런 시비를 걸지 못했다. 죽음은 어쩌면 그렇게 건조한 것일지도 모른다.

젖은 것은 너무 무거우니까.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럼증에 잠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고개를 들었고 갠지스의 가트를 따라 찌푸린 눈으로 소똥을 살피며 다시 걸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골 가게 만들기 힘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