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인 방황의 시작
그렇게 야심차게 발리 여행을 알아본지 이틀째, 요가와 풀만 있는 발리를 내가 잘 즐길 수 있는지 미지수였다.
게다가 논과 밭이 굉장히 많으며 그랩 오토바이를 주로 이용해야한다는 이야기에 겁이 났다.
'오토바이 탔는데 기사가 나를 이상한 곳으로 데리고 가면 어떻게하지? 영어를 잘 못해서 큰일나면?' 등등의 가상의 현실들이 나를 붙잡았다. ENTJ의 N이 여기서 발휘되었달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8년 전,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던 태국 친구들이 생각났다.
2015년 4월, 나는 국내에서 유명한 여행 커뮤니티의 일원 중 한명의 추천으로 처음으로 태국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 시기가 하필 송크란 축제 시즌이였다.
*송크란은 전세계 물총축제의 날이었다. 태국의 새해는 4월인데 불운을 씻고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물축제로 유명하다.
그렇게 첫 태국 여행에서 송크란을 즐기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여행 전, 한국을 사랑하는 태국 친구를 소개받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나를 공항 픽업부터 각종 태국에서의 투어들을 함께 해주었다. 나의 태국은 그 친구로 인해 색칠되어갔다.
그런 나에게 태국은 따뜻함과 도시다움을 모두 가진 나라였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보며 항상 웃어주는 사람들, 무엇이든 하나 더 주지않으면 안달나는 그들과 너무 행복하고 자유로운 시간들을 보냈다.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처음으로 계속 생각나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나를 위한 여행으로 태국의 방콕을 선택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으면서도 은근히 아는 사람이 있지만 나의 현재를 모르는, 편견없이 나를 봐줄 수 있는 친구들이 그리웠을지도.
태국친구 네이티에게 방콕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고 전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정말 여행이 시작되었다.
당장 그 주에 가고 싶었지만 이미 무수히 신청해준 워크샵들과 중요 약속들이 있어 천천히 출발하게 되었다.
가기 전까지도 내가 여행을 가는 것이 맞는 걸까,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건가, 내가 이렇게 쉬어도 되는건가? 아냐 너 잘 선택했어, 이 굴레를 수십번을 돌았다. 그 갈등 속, 드디어 대망의 D-1이 되었다.
전과 다르게 네이티가 나를 반겨주고 차를 타고 편하게 공항에서 나왔는데 정말 혼자, 방콕에 발을 붙이고 공항택시를 알아보는데 '진짜 나 혼자구나!' 싶었다. 택시를 탔을 때까지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고 그저 '내가 8년만에 혼자 해외에 나와있다고?' 라는 생각뿐이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너어어어무 더워서 방콕에 괜히 온건가 뒤숭숭해하며 숙소로 향했다.
여행감성에 젖어있던 찰나, 지도 앱을 안쓰고 출발하던 택시 기사 아저씨가 길을 잃었다.
영어를 못하는 태국 아저씨와 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 여행자는 열심히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로 언어불통임을 인지했는지 갑자기 어디 골목으로 나를 데리고가더니(진심 나 인신매매당하는 줄 알았다.) 어느 호텔에 도착해서 호텔 데스크 매니저에게 내 숙소 길을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나와의 불통을 느낀 아저씨는 영어할 줄 아는 호텔 매니저에게 길을 물어본 것이었다.
그렇게 드디어 길을 알아낸 아저씨는 차로 30분 거리를 거의 1시간 가까이에 걸쳐 도착했다.
심지어 가격을 기존 시세의 2배인 600바트(한화로 22,368원)를 달라고 했는데 쫄보인 나는 태국어로 승질내는 아저씨와 싸울 힘이 없었기에 원하는 돈을 주고 내 신체를 지키기로 했다.
아침 비행기에 지친데다가 길도 잃었는데
도착해보니 숙소가 외진 곳에 있어 괜히 무섭고 긴장되는 마음에 숙소에 2시간 콕 박혀있었다.
에어컨 빵빵 틀고 쉬다가 슬슬 배고파서 랏나 맛집을 찾았다.
심심해서 뭘해볼까 하다가 차이나 타운에서 유명한 재즈바를 예약 후 출발했다.
*랏나는 걸쭉한 소스를 얹은 볶은 국수라고 한다. 내가 먹어본 바로는 한국식 뜨거운 누룽지였다..
막상 밖에 나오니 외진 곳이라 무섭기는 해도
골목과 건물들의 분위기가 좋았다.
그랩을 탈까 하다가 뭔가 앱 오류가 자꾸 발생해 포기하고 근처에 지하철이 있어서 지하철을 탔다.
가는 길에 네이티가 차이나 타운이 위험하다며 조심하라는 DM에 엄청 긴장하며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었다.
맛집에 도착해 혼자 오렌지 주스와 랏나를 시켜 먹었는데
처음에는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느라 맛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친 더위와 함께 뜨거운 음식을 계속 먹으니 점점 더워서 식욕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결국 음식의 3분의 2를 남기고 거리에 앉아있는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 거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중국과 태국의 묘한 부분이 섞인 그 분위기.
몇몇 태국인들과 눈이 마주쳐 서로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잠깐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와, 이제 더이상은 안되겠다고 느껴 자리를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 여행을 준비하면서 태국이 재즈바로 유명한 것을 처음 알았는데,
SNS에서는 도시 느낌이 강한 재즈바들 중 코지한 느낌이 좋아해서 이곳으로 왔다.
그냥 재즈바가 아니라 태국의 전통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너무 일찍온 나머지 빈 시간이 생겼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친구들과 펍에 놀러온 분위기라서 약간 뻘쭘하던 찰나, 오후 8시 공연이 시작되고 나니 분위기가 확 변했다.
모두가 공연에 집중하고 음미하며 웃고 박수를 쳤다.
때로는 손님과 가수가 같이 대화를 나누며 공연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래 이거지, 내가 이 맛에 혼자 여행오지!
뭔가 몽글몽글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오랫만에 혼자서 체감할 수 있는 그 느낌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크렁싸이 노래와 그들의 목소리가 화합을 이루는 소리를 둘러쌓여 혼자이기에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나를 계속 혼자 여행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날은 낯선 공간에 조금씩 서서히 물들어가며 내 자신으로 서는 시작점이 아니었나 싶다.
그간의 시간들이 머리 속에서 스쳐지나가면서 정말 오랫만에 혼자 나 자신으로 서서 행하는 이 모든 것들에 있어 무서울 정도로 낯설고,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1시간이라면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의 감상시간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네이티가 차이나 타운은 위험하니 9시에는 꼭 집으로 들어가는 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구글맵으로 찾아둔 버스를 타러갔는데 버스정류장이 없었다.
정류장 비스므리한 그 무언가도 없었다.
당황하던 찰나에 지나가던 현지인에게 길을 물어보니 내 숙소가 굉장히 가까우니 택시를 타고가라는 것이다.
택시 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택시 덤탱이를 당해서 너무 두려운데, 꼭 택시를 타야하는거냐 라고 물어보니 불안해하는 나를 위해 그녀가 직접 택시를 잡아주겠다고 했다. 여기서 그녀의 도움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택시를 잡은 후 그녀는 당연하게 내 옆좌석에 앉았고 숙소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심지어 택시비도 본인이 결제하길래, 당황해서 '너 집은 어디야? 여기까지 와도 괜찮아?' 라고 물어보니까
'괜찮아, 우리 집 여기 가까워. 그러나저나 너 숙소가 어디야? 입구가 안보여!'라는 것이다.
'내 숙소 여기 맞아. 입구같지 않지만 여기야. 너무 고마워' 라고 말하니
내가 들어가는 뉘앙스를 보고 안심했는지 그녀는 쿨하게 뒤돌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쿨함과 섞인 친절함을 폭탄처럼 받아버려서 어안이 벙벙했지만 하루종일 긴장하며 돌아다닌데다
땀에 절은 나는 후다닥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절대 길 잃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