點狀出血
어느 날 어떤 일이 있었다. 그리고 저녁,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는데 눈 밑에 빨간 점이 발진처럼 다닥다닥 나있었다. 생경함을 느끼며 멍하니 매만져보다가 문득 이 일이 처음이 아님을 떠올렸다. 아, 나 아까 울었었지. 울면 얼굴에 순간적으로 압력이 세져서 두드러기처럼 빨간 점이 올라온다 했다. 처음 빨간 점을 발견했을 때는 병이라도 난 줄 알았다. 그때는 주근깨처럼 점이 콧대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름 충격적인 경험이었음에도 왜 바로 떠올리지 못했나 생각해 보니 지금으로부터 거의 2-3년 전의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눈물이라는 명확한 이유를 확인하고 나니 조금 개운해졌다. 한참 울고 더 이상 흐를 눈물도 없을 때의 묘한 상쾌함과 비슷한 것이다. 요동치던 마음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내 감정에 대한 나름의 적절한 대응을 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 같은 것도 든다. 운다고 해서 상황이 더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않지만, 내가 마땅한 상황에 마땅한 눈물을 흘렸다는 건 나의 이 상황이 누군가에 의해 인간사의 전기로 기록되더라도 부끄럼이 없을 거라는 묘한 자신감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감정이라는 건 참 다루기 어려운 존재다. 특히 기쁨과 슬픔. 두 극단의 감정이 유독 그렇다. 두 감정에 있어서는 유난히 남들 눈치를 보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기쁜 만큼 나도 기쁜지, 슬픈 만큼 슬픈지. 그 적절한 기준점을 계속해서 분석하고, 나도 비슷한 감정 내지는 감정 깊숙한 곳까지는 와닿지 않더라도 겉으로는 비슷한 표현(웃음, 눈물)을 내보이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내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주변인들에 대해 분석하다 보면 감정의 원천이 되는 어떠한 대상에 대한 내 개인적인 감상과는 점점 멀어져 가고 감정이라는 생각 자체에 지배되어 상황 자체가 기믹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다.
기쁨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해보자면, 친구와 함께 순천만 습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물론 순천만 습지는 가을이 절경이지만, 여름의 자연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구름 낀 하늘, 우중충한 날씨와 대비되는 초록빛 갈대가 더 운치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도 많이 없어서 한 정자에 앉아 고요히 바람 부는 풍경을 감상하던 중, 친구가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며 동영상을 켜고 풍경을 담았다. 나도 친구를 따라 했다. "너무 아름답지 않아?"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친구가 영상을 끄길래 나도 동시에 빨간 버튼을 눌렀다.
아름답다와 좋다는 동의어일까? 순천에 다녀왔다는 말에 학교 선배는 좋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순간 목이 잠긴 듯 말문이 막혀왔다. 풍경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습지 곳곳에 프레임을 갖다 대도 어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좋았는가? 분명 그건 다른 문제였다. 잠시 말이 없자 선배는 별로였냐고 되물었다. 그건 아니라고, 예뻤다고 하면서 휴대폰 갤러리에서 사진을 찾아 보여줬다. 대화의 주제는 여행으로 넘어갔고, 혼자 느꼈을 미묘한 감정의 균열은 잠시 무시한 채 함께 하는 대화에 집중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생각에 빠졌다. 감정과 생각의 괴리는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걸까. 아니, '괴리'라 칭하는 건 나뿐이 아닐까? 하지만, 분명 아름답다는 생각이고 좋다는 건 감정이었다. 순천만의 풍경은 물론 정말 멋졌다. 하지만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 내 마음을 울렸냐고 생각하면 또 아니었다. 물론 내가 친구보다 덜 감명 깊게 느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인생 전반에 걸쳐왔지만 지금까지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있던 어떤 문제가 이번 일로 인해 깨어나듯 물길 위로 솟아오름을 느꼈고, 목구멍에 걸린 가시를 당장 빼야 하는 것처럼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을 지경에 처해 있었다.
첫째, 풍경이 아름답다는 생각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행복한 감정을 느낀 건가? 둘째, 별다른 전환 과정 없이 그냥 본능적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낀 건가? 셋째, 그것도 아니라면 풍경이 멋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감정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존재하고, 대부분은 그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고 감정을 '연기'하는 건가? (사실, 연기라는 건 제삼자의 입장일 뿐, 스스로 연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감정 그 자체일 것이다) 아니, 이 문제에 정답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사실 나는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닌, 사실 모두 목구멍에 가시 하나쯤은 존재한다고, 그걸 빼내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말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가수의 입대 전 마지막 콘서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음을 줬었던 사람이 2년간 떠난다는 사실은 누가 들어도 슬프다고 생각할만한 일이었다. 마지막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조명이 켜지고, 반주가 흘러나오고, 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번째 이야기와 다른 점이라면 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다지 슬픈 노래도, 슬픈 상황도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는 건 나밖에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시 슬픔만큼 강하게 느낀 감정은 만족감이었다. 내가 이 상황에 적절히 융화되고 있다는 만족감.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점점 공연이 고조되고 이별을 암시하는 곡들을 부르자, 주변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눈물은커녕,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주변 관객들이 내 슬픔을 모두 앗아간 듯, 점점 그 시간이 멍하면서도 더디게 흘러갔다. 그때부터는 공연에 아무런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난 왜 슬프지 않지? 눈물이 흐르지 않지? 콘서트는 마지막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그제야 나는 눈물을 찔끔 짜낼 수 있었는데, 그것도 2년 동안 가수의 어떤 소식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외로워할 나의 언젠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한 뒤에야 가능했던 눈물이었다. 내가 첫 무대를 보고 순간적인 감정에 북받쳐 흐른 눈물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그건 감정을 건드린 눈물이었고, 이건 생각이 쥐어짜 낸 눈물이었다. 흐느낌을 넘어서 오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사람들과 나의 감정곡선은 명확히 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기분은 점차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게 만들었고, 가수가 손을 흔들며 무대를 빠져나갈 때, 나는 다른 팬들과 마찬가지로 손을 들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 속에 멍하니 빠져 있었다.
'남들과 다른 나'라는 특별함에 취하기에 딱 좋은 꼴이지만, 스스로를 적당히 싫어하는 사람에게 정상성의 범주에 벗어나는 특질이란 자괴감을 갖기 딱 좋은 핑곗거리이다. 난 그저 남들이 울 때 울고, 웃을 때 웃는 사람이고 싶었다. 난 생각이란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는, 감정을 온전히 감정으로만 느끼는 사람이고 싶다. 감정을 느낌으로써 인간다움에 한발 다가섰다는 사회 부적응자 같은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싶지도 않다. 그저 감정 그 자체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