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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코 Oct 21. 2022

의미와 덩어리


선한 것이 이긴다는 생각, 뭉툭한 것이 뾰족한 것을 집어삼키고 잠재우는 그림을 그리면서 속을 달래는 일에 익숙해진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욕망보다 어떤 것을 할지에 대한 의미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사실은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염원하는 마음은 대상을 상기하게 만든다. 대상을 생각하면 늘 지나치게 감상적인 기억의 편린들로 스스로를 응축시키게 된다. 그래서 염원의 대상을 자주 잊어버린다.


의도적으로 어떤 기억을 소실시킨다는 일은 우리 속에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숨을 쉰다는 사실을 망각하기가 쉬운 것과 같이, 우리는 늘 바라는 일을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어떤 소실은 좋은 작용을 하기도 하지만 단어를 잃어버리는 문장처럼 어떤 소실은 망각의 늪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 세상과 쉽게 단절되도록 만든다. 


붙잡는 일이 의미를 찾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면,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한다면 그 대상은 나를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 안에 있는 다른 이를 지칭하게 될 것이다. 대상은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대부분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죽은 이를 염원하는 일, 혹은 잊힌 과거의 좋았던 기억들을 되새기며 지금의 나를 다독이는 일은 비슷한 결로 이어지는 것만 같다.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늘 시간성에 탈락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존속에 목을 맨 나머지 자기 스스로를 지워내고 그 자리에 텅 빈 공간을 지향하게 만드는 무의식을 끼워 넣는다. 당연히 우리의 의식은 무의식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유와 무를 가르는 지평선 아래 거대한 강을 건너듯, 세포 간의 이동과 뇌혈관의 움직임을 자아내야만, 그 육신의 움직임에서 비롯해야만 누군가는 자각할 수 있다. 


부드러운 것이 거친 것을 갉아내지 못하지만, 거친 것과 거친 것이 계속해서 마찰을 일으킨다면 부드러운 것이 될 것이다. 역학적인 차원에서 운동이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 다양해서 주변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버린 일들을 감상하노라면 분명 의식의 틀이 내 안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 흐름으로, 심장의 맥박과 뇌혈관으로, 신경세포들의 미세한 입자들로 각인되고 그 일들은 쓰는 이에 의해 기록되고 성찰된다.


백색의 혈관, 무엇으로도 연결되어있지 않는 불투명한 액체는 모두 죽음이다. 자각하지 않는 사실은 죽음이고, 망각의 강에서 길어 올리는 이는 모두다. 쓰는 이도 보는 이도,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그 사이에 모두가 널뛰기를 하는 놀이로 귀결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두가 연결되어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를 찾는 데에 필요한 자원을 직시하길 원하는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의미를 잃은 단어도 문장도, 쓰이지 않은 글들을 목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혈관에서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마는 무의식의 흐름에 무책임하게 저버리는 수밖에 없다. 의미는 그렇다, 차원의 경계를 허물고 몇 단계를 건너 대양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삶과 죽음을 뒤바꾸는 의식의 덩어리다. 덩어리는 다시 쪼개지기도 하겠지만, 덩어리는 하나의 세포만으로 만들어낼 수 없으므로 거칠고 뭉툭하게 살아내 기어코 뾰족한 것을 삼켜야 한다. 뚜렷한 변화보다 앞서 의도와 의미를 응축할 대상을 담아내고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투명한 것으로 죽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탈락되는 스스로를 자각하기 위해서는 늘 빈 덩어리여야만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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