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소설, 삶

결말을 마주한 이들에게, 내 나름대로의 위로를

by Barrett

소설. 우리 삶과 가장 맞닿아있는 문학이다. 문득 생각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인간의 삶에서 비롯되었을까. 인간의 손을 거친 작품은 인간의 형태를 담아낸다. 이는 욕망이라기보단 본능이다. 우리는 자연스레 어디에나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역시 삶은 소설의 구조와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날이 어느새 쌀쌀해졌다. 걷다 보니 발끝이 서서히 굳는다. 살갗에 닿는 시린 공기가 한 해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소식을 전한다.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나는 아직도 땀에 푹푹 찌던 더위를,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흩날리던 꽃가루들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지난 반년은 어떠했는가. 곱씹어보자면 기억나는 일들은 그다지 없다. 그럼에도 시간은 가차 없이 흘렀구나. 괜히 미워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한적한 동네 카페에 발을 들인다. 메뉴판 앞에서 치즈가 올라간 크로플을 주문한다. 단골이기에 메밀차는 서비스다. 카페 아주머니에게 감사히 고개를 끄덕이고 뜨거운 메밀차를 호호 불며 마신다. 컵을 잡으니 어느새 따뜻해진 손의 온기가 느껴진다. 동시에 미워 보이던 하늘에도 조금은 마음이 녹는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잠잠해진다. 소설을 꺼낸다. 친구가 생일 선물로 전해주었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그리고 소설의 가장자리를 툭툭 건드리며 다시 생각을 끄집어 낸다. 정말 삶은 소설과 닮았을까?


우린 각자의 삶 속에서 주인공이다. 소설 역시 그러하다. 화자 혹은 ‘나’가 이야기를 이끈다. 음, 그렇다면 소설의 구성 단계를 생각해 본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나’를 주인공으로 두고 구성해 본다. 탄생을 발단이라 하자. 주인공인 ‘나’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첫 장을 맞이한다. '나'를 지상과 연결시켜준 엄마, 처음으로 눈을 뜨고 숨을 들이마신 '나'. 장편 소설의 시작점이 되겠다. 이때의 기억은 없다. 어느 누가 처음으로 눈 뜬 순간을 기억하겠는가. 삶이기에 다시 톺아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전개는 청소년기일 것이다. 세상을 처음으로 이해하려 애쓰는 시기. 다채롭지만 혼란스럽기도 한 페이지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 청소년기에는 전개, 위기, 절정을 수없이 마주했다. 필사적인 우정과 처음 느껴보는 사랑.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내 스스로가 감정 하나에 휩쓸리고 다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사소한 것 하나에 설레고, 웃고, 울었다. 십 대의 감정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트리거가 고장난 폭발물 같다. 하나하나 짚어보자면 내 삶은 소설 백 권은 거뜬히 할 것 같기에 넘긴다. 위기는 현실적으로 취업 준비이려나 싶다. 현재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자, 곧 닥쳐올 일이다. 이십 대에 들어서며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이야기를 이해했다. 사실 이십 대라 해 봤자 고작 삼 년 정도를 지나왔지만, 열 아홉 때와는 완전히 다른 고뇌를 하게 되었다. 이십 대는 청춘이라고 일컫지만,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처절하고 치열해야 한다. 아슬아슬한 시기가 위기 부분과 잘 맞아떨어진다.


절정은 예상할 수 없다. 언젠가는 찾아오겠지만, 그것이 기쁨일지 슬픔일지는 모른다. 절정은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니까. 그렇다면 다음은 결말이다. ‘나’는 발버둥 칠 수 있을 때까지는 발버둥 치되, 어떠한 결말이든 받아들일 것이다. 마지막을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궁금하다. 아직 내 소설의 절정 부분은 백지이다. 결말에 다다른 이들의 절정은 어떠했을까. 황홀했을까. 비참했을까. 혹은 절정 없이 끝을 맞이했을까. 그렇다면 절정은 결말에 영향을 미치는가. 삶의 끝을 해피엔딩과 배드엔딩으로 나눌 수 있나. 이는 누가 정하는가.


모르겠다. 혹여 비통한 결말이라 해도 살아온 날들이 행복했다면 그건 해피엔딩이 아닐까 싶다. 결말과 결과는 다르기에. 결과는 원인에 종속되지만, 결말은 인과에 얽매이지 않는다. '마지막'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 나름대로 만족하는 이야기라면 스스로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삶의 끝은 필연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결말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한 작품이 떠오른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인 노라는 마지막에 자신은 남편인 헬메르의 인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억압하던 ‘인형의 집’에서 탈출한다. 인형의 대가는 권력이다. 그녀는 자유를 얻고 헬메르를 잃었다. 세상을 보는 시야를 얻었지만 지위를 잃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이 결말은 해피엔딩인가 배드엔딩인가.


나의 입장은 해피엔딩이다. 평생을 방황하며 살아간다고 한들, 노라는 유리천장을 주체적으로 깼다. 자유로워졌다. 이는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와 직결되는데, 난 내 삶에서 자유가 1순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배드엔딩이라고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권력과 명예욕을 중요시하는 이는 그녀가 자신의 풍요로운 일상을 발로 걷어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해피도, 배드도 아닐 수 있다. 결국 견해의 차이이다. 결말에 대하여 다양한 논쟁이 오가는 것도 이 이유이다. 끝은 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하늘이 어둑해졌다. 뜨거웠던 메밀차는 식고 티백만이 남아 있다. <연인>을 덮는다. 한 소설이 끝났다. 그럼 내 삶에서 소설은 ‘끝’인가. 아니지, 또 다른 소설을 읽어나가야지.


삶과 소설은 닮았다. 결말은 ‘끝’과 같다. 삶의 ‘끝’은 죽음이다. 하지만 그 끝을 지나 또 다른 책의 다음 장을 넘긴다. 마지막 장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설이, 수많은 이들이 있기에.


누군가에게 전한다. 세상은 어김없이 흘러가지만, 비참하게도 인간은 만물의 흐름을 손에 쥘 수 없다. 그러니 결말을 맞이한 소설을 품에 안고, 걸어보자. 어딘가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보자. 그리고 그와 함께 적어냈던 이야기를 가끔씩 펼쳐 보자. 이야기는 마음속에 남으니까. 그 기억을 뿌리삼아, 다시 일어나 우리 각자의 소설을 써내려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