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합류 구간을 앞둔 터널 안. 주말이 길었던 탓인지, 붉은 브레이크등이 지루하고 길게 이어졌다. 앞차의 등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터널 벽면에도 붉은 기운이 번졌다. 마치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숨결처럼, 차들은 제 속도를 잃은 채 조금씩 앞으로 밀려갔다. 급할 것도 없는 속도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멈춘 것도 아니었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차들 사이에서 나는 핸들을 가볍게 쥔 채 라디오 소리를 낮춰 두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끝내 남지 않았다.
터널 안에서는 늘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빛이 일정하고,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아 계절의 감각도 잠시 멀어진다. 그래서인지 아무 예고 없이 어떤 단어 하나가 머릿속으로 떠오를 때가 있다. 그렇게 떠오른 단어를 붙들고 있으면 생각은 예상보다 멀리 번져간다.
그날은 ‘닻’이었다.
닻. 배를 한자리에 붙들어두기 위해 물아래로 천천히 내려보내는 무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바닥 어딘가를 붙들고 있어서, 물결이 밀려와도 배가 함부로 떠밀려가지 않게 하는 것. 왜 하필 그 단어였을까 싶다가, 어쩌면 요즘 자주 마주치는 표정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마음 둘 곳을 쉽게 찾지 못하는 얼굴들. 흔들리지 않으려 애쓸수록 오히려 더 흔들리는 순간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닻을 하나씩 내려두고 산다.
나도 조직과 숫자에 닻을 내려두고 사는 날이 많다. 어떤 날은 사무실에 나와야 비로소 하루가 제자리를 찾는 것 같다. 익숙한 책상, 늘 같은 높이의 모니터, 복도에서 마주치는 발걸음 소리. 그 질서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정돈된다. 출근길에는 분명 피곤했는데도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순간 이상하게 안심이 되기도 한다. 오늘도 시작되었다는 감각. 내가 여전히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곳에 마음을 묶어두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적어도 어디엔가 속해 있다는 감각, 표류하지 않고 있다는 감각이 생긴다. 어쩌면 사람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보다, 적당히 묶여 있는 상태에서 더 안심하는지도 모른다. 내일도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누군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고,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삶을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붙들어 준다.
내가 닻을 붙들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닻이 나를 붙들고 있는 걸까.
붙든다는 말과 붙들린다는 말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하나는 선택 같고, 다른 하나는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진 의존에 가깝다. 처음에는 필요해서 내렸던 닻이 어느 순간부터는 없으면 불안한 것이 되기도 한다. 익숙함은 편안하지만 동시에 조용한 두려움을 만든다. 이 자리가 흔들리면 나도 흔들릴 것 같은 마음.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자주 방향을 틀었다. 예고 없이 흐름이 바뀌고, 멀쩡해 보이던 계획은 어느 날 다른 표정을 한다. 조직은 단단해 보여도 쉽게 결이 달라지고, 숫자는 어제와 다른 얼굴로 아침을 맞는다. 어제까지 기준이던 것이 오늘은 더 이상 기준이 아니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럴 때마다 단단하다고 믿었던 자리의 감각이 조금 낯설어진다. 늘 같은 자리라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어쩌면 바다는 원래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여도 밑에서는 늘 흐름이 바뀌고 있는 곳.
그래서 문득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마음을 매어 두고 있는가.
조직이 흔들릴 때 함께 흔들리고, 누군가의 평가가 달라질 때 하루 전체가 무너지는 이유는 내 닻이 너무 바깥에만 내려가 있어서는 아닐까.
내 안 어딘가 깊숙이, 조용하지만 쉽게 빠지지 않는 닻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어떤 태도로 생을 대하고 싶은지. 무엇이 잘되든 잘되지 않든, 끝까지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은 무엇인지.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런 기준들은 대단한 선언처럼 생기지 않는다. 말을 삼켜야 할 순간에 조금 더 조심하는 마음, 피곤해도 약속한 시간을 지키는 태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끝까지 정리하는 손끝. 그런 것들이 오래 쌓여야 비로소 바람과 파도 앞에서도 쉽게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가 내린 그 마음속 닻이 가족과 내 곁의 사람들에게도 작은 안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언제든 돌아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세상이 흔들리고 불안할 때도 그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아주 크지 않아도 좋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 곁에서는 잠시 속도를 늦춰도 된다는 감각 하나쯤 줄 수 있다면.
터널을 빠져나오자 빛이 조금 넓어졌다. 차는 다시 속도를 냈고 나는 여전히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같은 길이고, 같은 월요일이고, 도착하면 해야 할 일도 비슷할 것이다.
다만 내 닻이 어디에 내려 있는지, 그 무게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