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집
살다 보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 거친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다. 예전에는 그 사람들이 특별히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심장과 강한 마음을 타고났다고 여겼고 때론 그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그들과 함께 지내며 가까이서 보니 내 생각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타고난 담대함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 속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적은 전투를 치렀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과 굳이 싸우지 않았다. 대신 지나가게 두었다.
그에 반해 나는 오랫동안 그 반대편에 서서 세상 모든 것을 붙잡으려 발버둥 쳤다. 부당한 말을 들으면 바로 되받아쳐야 했고, 악의적인 태도를 마주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다.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날 때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과 부딪히며 살았고 맞서 싸워 이기는 것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먼저 지쳐 떨어지는 쪽은 대개 나였다. 수많은 전투 속에서 지쳐 떨어져 나가길 반복하며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굳이 이겨야 할 싸움이 아닌 일들도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아니, 싸우지 않아도 되는 일이 더 많다는 사실을.
그럼 그 단단한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옆에서 본 그들은 상처가 될 말은 귀를 스쳐 허공으로 흩어지게 두고, 지나쳐야 할 사람은 인생의 배경쯤 되는 존재로 남겨 두고, 버거운 시기는 계절이 지나가듯 묵묵히 통과했다. 어떤 것도 마음속에 닻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단단함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행동했다.
그래서 한동안 나도 그들처럼 살아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고 세상의 소음이 편히 흘려보내지지는 않았다. 직접 해보며 두 가지 덕목이 필요하다고 느꼈으니 바로 용기와 절제다.
먼저 용기다. 나를 공격하는 말이나 태도에 반응하지 않았을 때 돌아올 오해를 감수하는 용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는 시선이나 기세에 눌린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는 불편함을 그대로 견디는 담담함이다. 진짜 용기는 칼을 휘두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칼을 뽑을 가치가 없는 일 앞에서 조용히 칼집을 닫아두는 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절제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지 않는 힘.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선택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은 언제나 이성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몸은 이미 반응할 준비를 마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을 한 박자 늦추는 것, 그 작은 간격 안에서 스스로를 붙드는 것이 절제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이 선택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조금씩 깊어진다.
생각해 보면 마음이 단단한 사람들은 대개 건강해 보인다. 얼굴에 불필요한 긴장이 없고, 말에 군더더기가 없으며, 몸 어딘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지 않다. 그들은 지나간 일을 오래 마음에 눌러두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말을 밤새 곱씹고, 끝난 상황을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하고, 바꿀 수 없는 일에 계속 에너지를 쏟는 일. 그런 시간을 오래 끌수록 결국 몸도 함께 지쳐간다.
반대로 그것을 오래 붙들지 않으면 호흡이 조금씩 깊어진다. 깊어진 호흡은 마음에 고요를 가져다 준다. 마음이 고요하니 잠이 깊어지고, 잠이 깊어지니 몸이 다시 회복된다. 잘 회복된 몸은 다시 마음을 단단하게 받쳐 준다. 그렇게 몸과 마음은 서로를 지탱하며 천천히 균형을 찾아간다. 흘려보내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이기도 한 이유다.
그래서 요즘은 가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우리를 가장 오래 괴롭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마음, 누군가의 시선에 쉽게 흔들리는 태도, 쉽게 얻으려는 요행, 그리고 나 자신을 갉아먹는 두려움.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들은 모두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를 가장 오래 괴롭히는 건 바깥의 일이 아니라, 그것을 끝내 놓지 못하는 내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조금 연습해 보려 한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일일이 대답하지 않는 연습이다. 불편한 기운이 내 문턱을 넘으려 할 때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그것을 지나가게 두는 연습이다. 말을 줄인 채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만 집중하는 연습이다. 대단한 결심이 아니다. 그저 하루에 한 번, 반응하지 않는 선택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작은 선택들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 나도 거센 바람 속에서 조용히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칼집을 닫아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