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마음의 퇴근

복잡한 아빠

by 현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요즘은 생각이 생각을 물고 늘어진다. 업무가 끝나도 마음은 부지런히 야근 중이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하루를 마치고 자리에 누울 때 정리한다는 감각보다 견뎌냈다는 감각이 더 익숙했다. 아니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나 자신을 몰아붙여야 마음이 편했다. 출근길보다 더 무거운 발걸음으로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괜찮은 척 퇴근 인사를 건네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마음속 소음들은 문밖에 두고 들어왔노라고 어색한 웃음으로 가족과 나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내어 보이지 않았을 뿐 걱정과 불안은 보이지 않는 기척이 되어 나를 따라 온 집안을 서성였을지 모른다. 모두에게 편치 않은 날들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틀 전 아침, 사무실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둘째 아이가 스케치북에 꾹꾹 눌러 그린 그림이다. 커다란 사각형 안에 서 있는 작은 사람 하나. 그 주변은 방향 없이 엉킨 선들로 가득하다. 사진에 메시지를 넣어 한번에 보내는 기능이 있는지 사진을 터치하니 짧은 문장이 적혀 있다.


“아빠 머릿속 생각이 복잡한 아빠야 사랑해요.”



하던 일을 멈춘 채 그림을 본다.


입술을 깨물며 메시지를 읽는다.


눈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들여다본다.


예쁜 하늘이나 귀여운 만화 캐릭터를 그리던 둘째 아이가 보내온 건 스케치북에 연필로 슥슥 그린 처음 보는 형태의 그림이었다. 어쩐지 낯설고,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그림이다. 그림 속 인물은 나일 것이고, 나로 추정되는 사람을 둘러싼 헝클어진 선들은 요즘의 나를 채우고 있던 생각들일 것이다.


아이의 눈에 나는 생각 속에 갇힌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직접 말하지 않았을 뿐, 불안과 걱정은 말 없는 그림자처럼 내 곁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그 그림자에 둘러싸인 내 모습을 본 모양이다.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람이어야 할 아빠의 뒷모습을.


아이들 앞에서는 괜찮은 얼굴을 유지하는 일이 어른의 몫이라고 믿었다. 말수를 조절했고, 불안을 설명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장난기 있는 말이 먼저 나왔고, 그렇지 못한 날엔 쉽게 짜증을 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 앞에서 나는 스스로 생각하던 아무 걱정 없는 세상 유쾌한 아빠를 연기해 왔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내 생각보다 깊고 투명했다. 설명하지 않은 불안과 말로 꺼내지 않은 무게들이 아이들에겐 이미 선의 형태로 보이고 있었던 것 같다. 복잡한 어른의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 복잡함을 풀어줄 수는 없지만, 아이들은 그저 그 복잡한 아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참으려 애썼던 눈물이 금방이라도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열려있는 사무실 방 문 사이로 혹시 직원들이 볼까 봐 입술을 삐죽 내밀고 턱에 주름을 잡으며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딸이 그려준 아빠의 모습과 메시지에서 느낀 감정은 단순한 감동이나 슬픔만은 아니었는지 입 안이 마르고 목이 뜨거워졌다.


무엇을 위해 이토록 걱정하고 고민해 왔었나 다시 생각해 본다. 결국 나를 숨 쉬게 하는 것은 정교한 비즈니스 전략도, 거창한 성공도 아니었다. 퇴근길에 나를 꼬옥 안아주는 아이들의 온기, 아내가 준비해 준 가족들과의 소박한 저녁상, 그리고 이 투박한 그림 한 장. 그것들이 불투명한 미래를 기웃거리며 헤매던 나를 다시 오늘로 데려온다.


생각이 너무 멀리 달아나지 않도록 지금 이 자리에 붙잡아 둔 채 정리해 본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한다고 믿어왔지만 사실은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아둔한 내가 그동안 이 일을 버틸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가족을 지켜야 할 힘을 밖에서 찾았지만, 정작 나를 지탱하던 힘은 이미 집 안에 있었다. 결국 나는 가족이 있었기에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다. 당장 해결된 문제도 없고, 불안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은 조금 맑아져 있다. 아마도 오늘은 무언가를 이겨낸 날이 아니라, 이미 내 곁에 있던 힘을 알아차린 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용기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곁에 와 있던 가족의 마음 같은.


오늘 저녁, 복잡한 아빠는 그 복잡함을 잠시 내려놓고 아이들이 건네준 사랑 한 장을 가만히 마음에 넣어둔다. 머릿속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마음만큼은 오랜만에 퇴근 종을 울린다.



작가의 이전글003. 그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