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손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어왔던 피아노를 시작했다. 친구들은 다 늙어서 무슨 피아노를 배우냐며 웃었다. 어떤 친구는 "그 돈으로 골프나 쳐"라고 했고, 또 어떤 친구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시작했다. 주말마다 한 시간, 시에서 운영하는 피아노 교실의 낡은 건반 앞에 앉는다.
오래도록 배우고 싶었던 악기라 열심히 했다. 투박하고 메마른 남자의 손가락으로, 서툴지만 열심히 맑은 소리를 엮어냈고 그저 좋았다. 건반 하나를 누를 때마다 방 안에 소리가 차오르는 그 감각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4주 차까지는 선생님께 칭찬도 많이 듣고 어렵지 않았다. '금방 피아니스트 되겠는데' 싶어 자만도 했다. 내 상상 속 피아노와는 조금 달랐지만 괜찮았다. 그동안 피아노를 멜로디 중심의 악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연주해 본 피아노는 대단히 디테일한 리듬을 요구하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단순해 보이는 동요 한 곡 안에도 지켜야 할 박자와 셈여림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벽이 나타났다. 왼손과 오른손이 각자의 음정과 박자로 움직여야 하는 순간. 한 몸에서 자란 두 팔인데, 서로 다른 언어를 동시에 말하려니 머릿속이 엉키고 손가락은 굳는다. 오른손이 멜로디를 따라가면 왼손이 멈추고, 왼손에 집중하면 오른손이 박자를 잃는다. 둘 다 잡으려다 둘 다 놓치는 순간이 반복됐다.
수십 년을 써 온 손가락들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답답함에 화가 났고 이내 생각에 잠겼다. 즐겨 듣던 그 많은 피아노 연주들이 모두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고, 두 딸이 주말에 피아노를 칠 때 음계만 외우면 쉬운 거 아닌가라고 생각한 내가 부끄러웠다. 그 시절 딸아이들 등 뒤에 앉아 무심하게 TV를 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 몸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걷고, 뛰고, 누르고, 쥐고, 숨 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반복 끝에 새겨진 것인지 잊고 산다. 어린 시절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걸음을 배운 것처럼,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모든 익숙함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틀리고 멈춘 끝에 겨우 얻어낸 결과물이라는 걸, 피아노 앞에서 되돌려 받았다.
그 어색한 사투 속에서 문득 사람 관계를 떠올렸다. 내 두 손 맞추는 것도 이토록 고된데, 하물며 타인과 호흡을 맞추는 일은 오죽할까.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같은 악보를 보고 나란히 앉는 것 자체가 이미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애초에 박자가 딱 맞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관계에서 들리는 불협화음을 실패의 신호라고만 생각했다. 서로 맞지 않거나, 내가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하지만 피아노를 치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긋남이 있다는 건, 적어도 우리가 함께 연주를 시도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곳에서는 소음조차 나지 않으니까.
조화는 완성된 상태로 찾아오지 않는다. 상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 속도를 늦추거나 당기며 맞춰가는 지루한 과정 끝에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거창한 의지가 아니라, 그냥 다시 앉는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 조금 안다.
서두를수록 더 엉키고, 천천히 귀 기울일수록 손가락은 부드러워진다. 인내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내일 다시 첫 음을 누르는 꾸준함이라는 걸 배운다. 잘 치는 것보다 계속 치는 것이 먼저라는 걸,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배우고 있다.
오늘도 건반 앞에 앉는다.
서툰 왼손과 어설픈 오른손으로.
언젠가 우리가 하나의 선율로 흐를 그날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봄이 오는 3월, 그저 오늘 내 자리에서 주어진 건반을 묵묵히 누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