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처음으로 내 등을 밀어준 날
2023년 1월 21일,
아이들과 처음으로 시댁 근처 '산호탕'이라는 목욕탕을 다녀왔다.
설연휴의 첫날인 21일 토요일,
남편은 갑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탕을 다녀오자고 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댁에 왔던 우리는 부랴부랴 시부모님이 쓰시던 목욕용품을 챙겨서 시댁 근처 '산호탕'으로 향했다. 비누랑 샤워타올, 샴푸, 린스, 수건 등 이것저것 챙기는 나를 보며 남편은 의아해했다. 목욕탕 안에 있는데 왜 굳이 챙겨가냐고 말이다. 남편은 그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여탕에는 (모든 곳이 그런 건 아니지만) 비누도 수건도 없다는 것을. 사실 나는 남탕에는 비누도 있고 수건도 제공해 준다는 사실에 놀랐었지만..
갑작스러운 목욕행에 처음으로 목욕탕이라는 곳을 가는 두 아이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8살 딸과 1층 여탕으로 남편은 5살 아들과 2층 남탕으로 들어갔다.
채윤이는 여탕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집으로 가자고 난리를 쳤다. 모두가 벗고 있는 곳에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도 옷을 벗는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수건으로 몸을 가려 들어가도 된다', '목욕 끝나고 아이스크림 사줄게', '속옷만 입고 들어가자' 그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럼 탈의실에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들어가자고 협상을 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어릴 때 목욕탕에 들어가면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나체로 걸어 다니는 게 왜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어렸을 때의 나도 수건으로 내 몸을 가리고 욕탕 안으로 항상 들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긴 시간 기다려도 사람이 오고 가는 이곳에서 아무도 없을 때까지 기다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엄마라는 이름의 권력으로 아이에게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렇게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수건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는 나의 손을 잡았다. 욕탕이 있는 문을 열려는 찰나 입구에서 '아이스티 3,000원'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채윤아, 우리 그럼 아이스티 사서 들어갈까?" 그 말에 곧 울 것 같던 아이의 얼굴이 살짝 풀리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얼음 가득 담긴 아이스티를 들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설연휴 첫날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아이가 부끄러워할 것 같아 제일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이다. 이 습하고 무거운 공기의 느낌. 어릴 때는 참 싫어했는데. 지금은 그리울 지경이다.
부끄러운 듯 주변을 살피던 딸아이는 목욕의자에 앉아 탐색을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 나의 엄마가 그러했듯이 사워타올에 비누를 묻혀 목욕의자를 박박 씻고, 탕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꼬불꼬불 줄로 만들어진 목욕탕 키로 머리를 댕강 묶으며 몸을 비누 칠하여 깨끗이 씻었다. 다행히 온탕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딸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우리 저기 탕 안에 들어가 볼래?"
아무도 없는 탕 안에 아이는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탕은 나의 체온보다도 낮은 온도 같았다. 미지근한 온도의 물에 약간 실망했다. 하지만 채윤이에게는 딱인 듯했다. 이내 긴장이 풀린 딸아이는 탕 안을 자유롭게 다니며 아이스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외식할 때 마음에 드는 식사를 할 때마다 "엄마, 우리 여기 또 오자!" 그런다. 그런데 목욕탕 탐색이 끝난 딸아이가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엄마, 우리 여기 또 오자. 너무 좋아."라고 한다.
하나씩 하나씩 용기를 내서 낯선 것에 도전하는 딸아이가 나는 매번 대견하다.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딸아이의 마음을 최대한 읽어주려 노력하고 싶다. 어쨌든 생애 첫 목욕탕의 마무리는 아주 좋게 끝났다.
"여기 또 오자"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월 중순 우리는 다시 '산호탕'을 찾았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신이 난 채윤이는 어서 들어가자고 난리다. 지난번에는 명절 전이라 사람이 적었는데 이번엔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하지만 채윤이는 지난번처럼 두려워하지도 낯설어하지도 않았다. 탕 입구에서 3,000원짜리 얼음 가득 아이스티를 어김없이 받아 들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 모녀는 열심히 몸에 비누칠을 하고 몸을 씻었다. 바글바글한 온탕 안으로 거림 낌 없이 들어가는 딸아이를 보며 내가 걱정하고 염려하던 너의 속도가 생각보다 그리 느리지 않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두 번째 목욕탕에서는 나의 때 미는 시간도 챙길 수 있었다. 온몸 구석구석 비누를 묻히며 열심히 때를 밀고 있는 모습을 보던 딸이 스윽 다가와 말한다. "엄마, 등은 내가 밀어줄까?"
결혼 전까지 친정엄마와 목욕탕을 자주 다니던 나는 항상 엄마의 때를 밀어주던 기억이 떠오른다. 넓고 토실토실한 등살 위로 엄마의 때를 밀어주는 순간에는 내가 뭐라도 엄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정도는 있어 뿌듯했다. 딸아이의 등 밀어줄까라는 소리에 나의 친정엄마를 생각했다. 이제 엄마의 등은 누가 밀어주는 걸까.
즐겁게 목욕탕 나들이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온 아이는 일기장을 펼쳐 들고 열심히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신난다 신나. 왜냐고? 산호통에 갔거든. 히히.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이제 안 무서워"
딸이 있어 참 좋다. 같이 목욕탕 갈 친구도 생겼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