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램 차우더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은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 그런지 대체로 해산물로 만든 음식들이 유명한 편인데 주로 랍스터, 조개관자, 오징어, 조개, 굴, 흰 살 생선 등을 이용한 수프, 튀김, 구이 등의 요리들의 종류도 다양하고 많을 뿐만 아니라 맛들도 아주 일품이다. 만약 누군가 내게 보스턴에서 반드시 먹어 봐야 할 음식 한 가지가 무엇인지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난 아마도 망설임 없이 클램 차우더 (Clam Chowder)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많은 음식들 중에 하필이면 클램 차우더를 추천하는지 묻는다면 일단은 제일 유명하기도 하지만 보스턴에서 첫 유학 생활을 시작했을 그 당시 하나부터 열까지 낯설고 외롭기만 했던 내게 보스턴이란 도시에 대해 마음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 수 있게끔 도와준 웰컴 디시(welcome dish) 같은 느낌을 받았었기 때문이랄까?
보스턴 시내에는 퀸시마켓(Quincy Market)이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데, 마켓이라는 이름이 약간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크고 오래된 건물이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건물에 대한 내 첫인상은 마켓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공서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아주 오래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먹자골목이자 시장이라고 한다. 건물 바깥에서도 온갖 맛있는 냄새들을 맡을 수 있는 퀸시 마켓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양 옆으로 빼곡하게 입점된 다양한 음식점, 기념품 가게들, 디저트 가게들과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가득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난생처음 보는 것들 뿐이라 그저 신기하고 새로웠을 그때의 그 느낌을 기억하자면 마치 소설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첫 발을 디딘 모험가가 이런 느낌인가 싶은 느낌이 들었었다.
같이 온 친구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여기저기 바쁘게 두리번거리며 가게들을 둘러보는데, 그 당시 (약 2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는 자주 보지 못했던 신기한 음식들-랍스터 롤이나, 아이스크림을 빵에 끼워 토핑을 얹어먹는 먹는 쿨 도그, 양손바닥보다 더 큰 피자며, 엄청난 토핑의 팝콘이나 캔디, 아이스크림 등등이 여기저기 곳곳에 있으니 정말 눈 돌아간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동네 마실 나온 기분으로 왔던 나와는 달리 같이 왔던 친구들은 이미 맛집 조사까지 착실하게 끝내 온 모양이었다. 이 많은 것들을 다 먹을 수는 없는 모양이고 그렇다고 나 혼자 어디를 가려고 결정하려면 어김없이 결정장애가 발동하기 때문에 오늘은 어떤 가게들을 갈지 이미 정해 놓고 움직이는 친구들을 따라다니기로 했다.
친구들을 따라 제일 처음 간 곳은 건물 끝쪽에 있는, 수프 그릇 그림이 간판으로 걸려있는 수프 집이었다- Boston Chowda.
'수프??' 사실 고기나 햄이 들어간 음식들을 기대했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수프를 먹게 된 마당이라 조금은 당황스러움과 실망감이 들었다. '그냥 다른 거 먹는다고 할까?'라는 생각이 들다가 괜한 모험을 하는 게 귀찮아져서 그냥 순순히 수프를 기다리기로 했다. 내 차례가 되고 주문을 마치자 커다란 빵 속을 파낸 빵 그릇 안에 건더기가 가득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수프를 그득 퍼서 담아주고 곁들여 먹는 작은 크래커 한 봉지와 함께 접시에 담아 건네주었다.
'옴마? 이거 왜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거지?'
수프 먹는다고 투덜거렸던 모습은 어느새 온데간데 사라지고, 수프에 시선이 오롯이 집중되어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건더기가 많은 평범한 크림수프 같아 보였지만, 냄새는 정말 범상치 않은 맛있음이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한 스푼 크게 떠서 입으로 호호 분 뒤 한입.
'!!!!!!!!'
조금 더 과장을 보태자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수프라고 먹어온 건가 싶은 회의감이 살짝 들 정도의 맛이었다. 짭짤하고 고소하며 농후한 조개 국물과 크림의 감칠맛이 입안에 확 퍼졌고 오동통한 조갯살과 잘 익은 감자의 씹히는 식감과 맛이 정말이지 일품이었다. 살짝 얼빠진 상태로 수프를 먹다가 문득 친구들을 보니 같이 갔던 친구들도 역시나 '맛있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만족스러운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수프를 사기 위해 기다리면서 맞은편 가게의 디저트들이나 아이스크림이 더 눈에 들어왔었는데, 어느새 그런 생각들은 온데간데 없어진 지 오래였다.
사실 유학을 와서 음식 때문에 꽤 고생을 했었더랬다. 나만큼은 절대 음식 때문에 향수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을 했었었는데 이게 웬걸- 여행 가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튜브형 고추장이나, 한국 음식점을 찾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뭘 먹어도 그 맛이 그 맛 같았고 시큰둥하게 다가오던 그런 시기에 나는 클램 챠우더를 만났다. 적당한 감칠맛과 짭짤하고 고소함으로 무장한 첫 클램 챠우더는 그 당시의 내게 무척이나 따뜻했고 또 다정하게 다가왔었다. 물론 클램 챠우더의 매력에 빠진 이 날 이후로도 종종 자주 들러서 사 먹기도 했다.
시간은 흐르고 보스턴이 아닌 곳에서 클램 챠우더를 배워서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그때 충격적으로 맛있었던 클램 챠우더를 다시 만들어 봐야겠어!라는 야무진 다짐과 함께 레시피를 꼼꼼하게 체크하고 선생님의 설명을 잘 들으면서 만들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얼추 비슷한 맛이 났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왠지 아쉬운 마음에 시판용 클램 차우더나 집 앞 마켓이나 샌드위치 가게에서 파는 클램 차우더를 사서 먹어봤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질 뿐 도무지 그 기억 속의 맛이 소환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생에게는 언니가 대장금을 뛰어넘는 절대 미각 자냐며 놀림을 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대답한 장금이 마냥 그때 그 맛이 나질 않아서 그 맛이 아니라고 했을 뿐인 것을.
:: 클램 챠우더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