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대파 수프
생각했던 것과 달리 요리학교에서의 첫 실기 시험은 지금까지 배웠던 기본 소스 만들기나 채소들을 모양내어 썰기 또는 따로 나누어준 프린트물에 나온 내용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첫 실기 시험 주제는 가장 자신 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제대로 된 요리라는 걸 해본 경험이라곤 학교에서 실습한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내게는 익숙한 늘 집에서 해 먹던 국적 불명의 음식을 선보인다고 해도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음식에 대해 설명을 할 자신이 도무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메뉴로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다 첫 시험은 화려해 보인다거나 조리과정이 복잡한 요리를 하는 모험을 하기보다는 조리 시간이 길지 않고 어렵지 않은 안정적인 레시피 소위 '안전빵'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시험을 준비하며 제일 먼저 시작했던 일은 역시 검색! 철저한 검색만이 나의 유일한 살 길인 것처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쉽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너무 없어 보이지 않는 요리들과 레시피들을 찬찬히 찾아보았다.몇가지 후보들을 추려본 뒤에 대파 감자 수프(Leek and Potato soup)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괜찮아 보이는 몇몇 가지의 수프 레시피들을 뽑아 보고 그중에서 공통적인 재료들이나 과정들을 나름대로 정리 해 본 뒤에 추가해 보면 좋겠다 싶은 것들과 생략해도 될 것 같은 재료와 과정들을 조합해서 시험용 레시피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만들어 놓고 보니 생각보다 간단해 보여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 보잘것없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불안함도 있었지만, 허둥지둥 헤매다 완성을 못하게 되는 것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그대로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실기시험 아침에는 긴장을 과하게 했던 탓인지 평소보다도 훨씬 이른 시간에 집에서 나와 학교로 향했다. 근처 마트에 들러 시험에 필요한 재료들- 감자, 베이컨, 리크(Leek), 치킨스톡 등과 간단한 점심거리를 산 뒤, 수업 시간 전 까지 비어있는 강의실에 혼자 앉아 레시피를 다시 복습하면서 점심거리로 샀던 차가운 샐러드 파스타를 먹으며 약간의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다가오자 비어있던 강의실이 속속들이 모이는 학생들로 차기 시작했다. 다들 뭘 그렇게 준비해왔나 싶어서 슬쩍 보니 괜한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평소에 보지 못했던 식재료들을 줄줄이 꺼내 놓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양으로 승부를 보겠다며 엄청난 양의 재료들을 준비 해온 학생들, 얼핏 봐도 제법 값이 나가는 재료들을 준비해 온 학생들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다 내가 준비해 온 것들을 보니 상대적으로 위축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뭐 이 시험이 전부는 아니니까'라는 생각을 하고는 먹고 있던 파스타를 전부 입에 밀어 넣었다.
"시작!" 소리와 함께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던 마음속이 울쑥불쑥 난리가 나 버렸다. 잘 정리해서 외운 것 같은 레시피는 갑자기 생각이 안 나고 수업 전에 먹었던 파스타가 체해서 얹힌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과도한 긴장감 탓에 말 수도 줄어들고 표정이 굳고 얼어있는 게 보이는지 "어차피 다 초보들이야 너무 긴장하지 마" 라며 옆자리 친구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었다.
냄비 안에 크게 잘라 넣은 버터가 녹기 시작하자, 썰어서 준비 해 두었던 리크와 감자를 넣고 볶아주다가 채소들이 살짝 익어가는 것이 보이자 치킨 육수를 붓고 끓기를 기다렸다. 그다음엔 핸드믹서나 블랜더로 끓여준 채소들을 육수와 같이 곱게 갈아주어야 하는데 평소에 잘만 보이던 블랜더들이 교실 어디에도 보이 지를 않았다. 스무 명이 한 공간에서 동시에 움직이는데 누가 어떤 요리들을 하고 어떤 조리기구들을 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같은 반 학생들도 정신이 없던 탓에 기구들을 쓰고 화구 옆, 향신료 선반 위 등 아무 데나 두었기 때문이었다. 교실은 말 그대로 도뗴기 시장 같았다. 사람 수에 맞지 않게 적은 조리기구들 개수 때문에 여기저기서 서로 조리기구들이나 교실에 비치된 향신료들을 서로 찾기 바쁘고, 냉장고 문이 열린 채 방치되어 있었고, 그냥 급한 마음들에 비속어들이 여기저기서 난무했었다. 이 날 따라 핸드믹서는 왜 이리도 인기가 좋은지, 나는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핸드 믹서기 하나를 찾아서 쓸 수 있게 되었다.
혹시 여기서 눈치를 챈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재료 하나를 훌륭하게 빼놓고 수프를 열심히 갈고 있었다. 바로 베이컨. 분명 준비해 간 레시피에는 잘게 자른 베이컨을 버터와 함께 볶아낸 후, 건져내서 수프의 가니시(garnish)로 쓸 수 있게 보관해두고, 버터와 함께 녹인 베이컨 지방은 감자와 리크를 볶아내는 데 쓰는 것이었는데, 조리 시간이 끝나갈 때 즈음 주변 정리를 하며 보니 마트에서 사 왔던 베이컨이 봉지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맙소사!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가니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옆자리 친구가 쓰고 남은 쪽파 몇 가닥을 얻어 송송 썰어서 수프 위에 얹어주고 그 외에 쓸만한 것들이 있나- 둘러보다 딱히 쓸만한 것들이 보이지 않아서 애꿎은 파슬리만 덤으로 더 뿌려 댔었다.
솔직히 그 당시 맛을 기억해보면 수프라고 하기엔 조금 되고, 식을수록 어쩌면 감자 퓌레에 가까운 조금은 텁텁한 감이 있던 맛이었다. 첫 요리 시험인 덕에 긴장도 잔뜩 하고, 지식도 짧았었던 데다 불난 호떡집 같은 교실에서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조리기구를 찾아 헤매느라 시간도 허비한 탓도 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쉬움이 잔뜩 남은 마음에 복습도 할 겸 남은 재료들과 몇 가지를 더 추가해서 집에서 다시 만들어 보니 꽤 나쁘지 않은 맛에 나름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꽤 훌륭한데? 나쁘지 않은 출발이야! 대성하겠어!" 물론 혼잣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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