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지 못하는 사람
"사당 오늘 저녁에 간단하게 술 한잔 하실 분?"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늦은 오후, 'K'에게 캡쳐본이 카톡으로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사람을 구하는 글이다.
언듯 보면 그가 인력시장 사무소를 운영하는 소장처럼 보이는데 그런 것은 아니고, 퇴근 후에 함께 저녁식사(with 알코올)를 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종류의 '사람'은 아니고, 성별은 여성이면서 소위말하는 어느 정도 외모가 되는 '사람'만이 자격이 생긴다.
'K'의 말에 따르면 직장인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저런 구인글을 올리면, 두세 명씩은 꼭 연락이 온다고 한다. 연락온 이들과 사진교환을 하고 쌍방합의가 되는 사람과 실제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된다. 이후 밥과 술에 취하며 상호 합의가 된 지점까지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나는 'K'의 구인구직 후기를 듣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나는 그렇게 모르는 사람과 만나 밥과 술을 먹으며 즐거움을 느낄 성격도 아니거니와, 퇴근시간만 기다리며 방전된 나의 몸을 이끌고 집이 아닌 곳으로 출전(그의 말을 빌리면)하는 건 내게 거의 불가능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대리만족이랄까.. 그의 하룻밤의 영웅담을 듣는 게 내 입자에선 잃을 것 없는 매우 가성비 좋은 경험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줄행랑썰이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대부분 사진과는 조금 다른(Negative) 외모인 사람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차마 놀지 못할 정도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운수가 참 나쁜 날에는 사기죄로 고소를 해도 본인이 승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심각한 괴리가 있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럴 땐 간단한 1차 후 최선을 다해 설득해 귀가시키거나 어쩔 땐 36계 줄행랑을 쳐본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암담하고 참담했던 순간을 두 손 두 발을 활용해 설명하는 대목이 나에게는 가장 큰 웃음포인트였다.
가장 놀라운 점은 'K'는 이 랜덤디너를 말 그대로 매일매일 한다는 것이다. 월화수목금토일 정말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새로운 사람과 밥과 술을 먹는다. 백이면 백 술을 먹기 때문에 사실상 그는 일주일 내내 취해있다고 봐도 무방한데, 큰 문제없이 직장을 다니고 살아가는 거 보면 그의 체력과 정신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가 굉장히 유흥을 좋아하고 난잡하게 노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말 흥미롭고 신비롭기까지 한 사실은 그는 육체적인 관계는 지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매일같이 다른 여성과 잠자리를 했다면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매스꺼워 고역이었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특히 침대 위의 잠자리 관련된 난잡하고 부적절해 보이는 이야기를 듣는 걸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여성 쪽에서 너무 원해서 어쩔 수 없이(?) 숙박업소까지 들어갔는데, 달려드는 그녀를 겨우 막아내고 잠만 자고 나왔다는 스토리도 있을 정도로 그는 육체적인 관계에 목적이 없어 보인다는 게, 내가 그의 이야기를 거북하지 않게 꾸준히 애청하고 있는 이유이다.
대부분의 저런 류의 '번개'를 즐기는 남자들은 많은 여성과 경험을 갖는 것에 목적이 있을 것이다. 정말 나의 동반자를 만날 목적이라면 지인 소개라든지, 심지어는 결혼정보사를 활용하든지 할 것이다. 그 편이 상대에 대한 불확실성의 리스크를 줄일 수도 있을뿐더러 나의 유한한 체력과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불확실하고 무작위적인 만남이 그들은 편안하고 부담 없는 하나의 놀이로 느끼지 않을까. 함께 보낸 시간이 지나고 내일의 해가 뜨면, 둘은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닌 것이고 그렇기에 상대를 책임지거나 상대를 크게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즐거운 시간과 도파민은 이미 획득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쩌면 저비용 고효율의 행위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가벼움이 주는 안락함이 그들을 매일밤 모르는 상대의 앞으로 데려다 놓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정서적 일회성 교류'가 가장 중요한 'K'에게 나는 당신의 그러한 심리에 대해 반문한 적 있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 소모적인 행위를 지속하는 것이니?
그에 대답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는데, 우리의 신인류 'K'가 말하길 그 불확실함과 비효율의 극치인 랜덤디너쇼를 지속하는 이유는 퇴근 후 혼자 있기가 죽을 만큼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지옥 같은 대중교통을 타고 회사로 출근하고,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퇴근이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 혼자 있다 보면 공포스러울 정도의 허망함을 'K'는 느낀다고 한다. 하루 종일 남의 인생을 살다가 집에 와서 겨우 '내'가 되는데, 어느 날 '내'가 하는 거라곤 침대에 누워 다음 출근을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퇴근 후에 곧장 집으로 갈 수 없었고, '내' 모습으로 하루 중 두 번째 삶을 살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를 모르는 생판 남의 앞에선 무슨 말이 든 할 수 있었고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K'가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당장 뱉어진 말들과 짓는 표정, 들썩이는 행동들로만 판단해 주었는데, 그게 'K'로 하여금 하루의 끝에 굉장한 위안과 보상이 된다고 한다. 당장 회사에서는 나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실시간으로 평가받고 점수가 매겨진다. 그 평가와 점수들이 누적될수록 스탯을 잘못 찍은 RPG게임의 캐릭터로 계속 플레이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무언가 잘못되었지만 고칠 수 있는 시간은 없으니 묻어둔 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하루하루가 그의 목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K'에게 깊은 공감의 감정이 들었다. 나 또한 매일매일의 직장생활이 버겁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다. 퇴근을 해서 침대에 누우면 당장 오늘 해결하지 못한, 내일 부리나케 해야 할 업무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렇다고 집에서 추가업무를 하지는 않는다, 그럴 에너지까지는 없다. 그냥 당장 나에게 주어진 침대에서 내일의 걱정거리를 곱씹으며 'K'의 표현처럼 다음 출근을 기다리는 모양새다.
단순히 그에게는 퇴근 다음의 삶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담되지 않는, 나에게 어떤 선입견도 없는, 사람과의 저녁식사가 그에게는 숨 쉬기 위한 탈출구였던 것이다. 그게 조금은 이상해보이는 형태로 발현되었지만,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상대와의 육체적 관계를 지양한다는 점이 그의 '랜덤디너쇼'의 동기를 확실히 보여준다. 그는 퇴근 이후의 나로서의 삶을 향유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지, 어떠한 가시적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녀들과 침대로 갈 이유도, 가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의 이러한 생존형 취미(?)는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육체적 관계를 지양하는 그의 매우 쿨한(?) 태도와 그의 해방감에서 나오는 허심탄회한 매력들에 그녀들이 매혹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여성 측의 적극적인 대시로 적지 않은 횟수의 연애들을 경험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이렇게 일주일 내내 놀면서 에너지와 체력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상대를 정하여 정착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곧 그게 그가 원하는 안식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가 원하는 건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처녀비행인 것인데, 정착을 하게 되면 어딘가에 새롭게 속박되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에게는 첫 만남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로움만이 가장 큰 가치였던 것이다. 그렇게 느끼고 나서부터는 상대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지 못한 채 몇 주, 길게는 한 달 정도 만남을 질질 끌다 헤어짐 당하는 게 최근 모양새다.
그는 최근 '랜덤디너쇼'의 철칙에 한 가지 항목을 추가했다. 기존에 있던 '육체적 관계 지양'에 덧붙여, '세 번 이상 만나지 말 것'이라는 항목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두 번째 만남까지는 새로움에 대한 싱싱함이 느껴지는데, 세 번째부터는 그 싱싱함이 사라진다고 한다. 앞의 두 번의 경험으로 자신을 단정 짓고 판단하고 분류하려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두 번째까지 그 프레쉬함을 즐기고 세 번째는 온갖 핑계와 변명을 통해서 상대를 끊어내고 있다. 그의 '랜덤디너쇼'가 오랜 시간 유지될수록 철칙들이 점점 추가될 거고 점점 'K'만의 무너뜨릴 수 없는 완벽한 캐슬이 완성될 것 같다.
'K'라는 인간의 퇴근 후 제2의 삶에 대해 듣고 간접경험을 하며, 나는 일정 부분 그를 이해하면서도 측은함을 느꼈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나 자신으로서의 삶에 대한 안식일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건설된 그 만의 성에 들어가 최대 2회짜리 싸구려 인스턴트 도파민만을 섭취하고 있는 그가 걱정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가 언젠가 그의 왕국을 붕괴시키고 제대로 된 편안함에 도달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