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움 / 뉴욕 / 2014.8.19 망원
허울 좋은 제천영화제를 뒤로 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까 고민하다 결국 을밀대에 가서 평양냉면을 먹기로 했다. 오늘은 마침 비가 왔고, 먹다 남은 김치찌개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한 줌의 위안으로 다가왔다.
어학원은 맨해튼의 23st 6av쯤에 있었고, Fresh pond에서는 40분쯤 걸렸다. 반편성을 위한 테스트를 받았고, 주관식 답안 작성을 위해 옆에 앉아 있던 여자에게 펜을 빌렸다. 나는 '영어공부절대로 하지 마라'의 맹신자였고, 영어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편성된 반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여기가 뉴욕인지, 종로 한복판의 어학원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끔 일본어 억양이 섞인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비로소 여기가 뉴욕임을 실감했다.
우연인지, 시험 때 펜을 빌렸던 여자도 나와 같은 클래스였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그 여자는 뉴욕에 온 지 1년 정도 되었고, 영어를 같은 반 학생들에 비에 꽤 잘하며, JFK 공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여자는 한국사람이었다.
수업은 아침 8시 반 정도에 시작해, 점심시간에 끝났고, 그 여자와 나는 자연스럽게 점심시간의 한 복판에 놓였다. 누구나 첫 만남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어서였을까, 우리는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생전 처음 맨해튼 거리를 거닐면서, 나는 당연하게도 여기저기를 촌놈처럼 쳐다봤다. 사람들, 건물들, 냄새들 모든 게 신기했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서있던, macy 백화점을 지나, 우리는 맥도널드에 들어갔다.
7,8달러 정도 하는 버거를 거리낌 없이 주문하는 그 여자를 보며, 나는 조금 놀랐다. 2009년 당시 아직 대학가 앞에서는 3,000원 정도면 된장찌개를 먹을 수 있었다. 어쨌든 나도 같은 것을 주문했고, 여자는 '처음이니까 제가 기념으로 쏠게요'라며 쿨하게 계산을 했다. 버거의 본고장에서 먹는 버거맛은 꽤 괜찮았다. 버거를 먹고, 우리는 '쿨하게' 각자의 길을 갔다. 어차피 내일이면 어학원에서 또 만나게 될 사이였다.
나는 나에게 갑자기 주어진 수많은 시간에 대한 버거움을, 혼잡한 맨해튼의 거리 한복판에서 느끼고 있었고,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내 손에는 무거운 기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