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gin again?

음악 일기 / 뉴욕 / 2014. 9. 9

by 전찬준

휴식의 연장선은 지루함과 닿아 있고, 지루함은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들 중 하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늘 필요하다 느끼지만, 사실, 필요한 만큼이면 충분한 것이다.


오랜만에 강릉 고향집에 왔다. 동생의 옷장에서 힙합키드들이 쓸 법한 모자 하나를 비뚤게 쓰고 집을 나섰다. 어제 자기 전에 감은 머리는 심하게 뻗어있었고, 다시 감기도 귀찮았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어색하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내내 어색한 모습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불편함을 느끼기 위해 다양한 옷을 입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자 하나로 기존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나를 만난 것 같다는 신선한 불편함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내 손에는 우쿨렐레가, 어깨에는 지구마을에서 구입한 네팔 산 푸른 천가방이 걸려 있었다. 아무튼 내 모습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한때 힙합을 좋아했던 사람이 인도 여행을 다녀와 결국엔 우쿨렐레 연주의 길로 들어선 것 같았다.


김애란이나 김연수의 소설을 하나 사서 읽을 생각으로 서점에 들어갔다. 신경숙의 리진과 돈까밀로와 뻬뽀네라는 제목의 책을 뒤적이다 결국 최민석의 쿨한 여자라는 소설을 사서 나왔다.


근래 계속 돈가스가 먹고 싶어, 소풍으로 가는 골목길로 접어들었지만, 소풍은 문을 닫았고, 육개장집과 감자옹심이집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결국 감자옹심이를 먹기로 했다. 옹심이집 담에는 1박 2일에 나왔다는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다. 생각보다 유명세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나 보다.


젊음의 특권은 무엇을 해도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옹심이를 먹고 나와 잠시 걷다가, 골목 안에 위치한 아담한 교회 옆 벤치에 앉아, 건너편 가정집에 핀 해바라기를 보며, 우쿠렐레를 연주했다. 주위가 워낙 고요해서, 우쿨렐레로 고요함을 침범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꽤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강릉에서 가장 잘 나갔던, 이제는 독립영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신영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Begin again과 자유의 언덕 두 편을 볼 생각이었다. Begin again을 보는 동안 음악이나 영화의 내용에 집중하기보다는, 뉴욕의 골목들이 스크린에 비칠 때마다, 나는 나의 자취를 찾으려고 애썼다. 뉴욕이 그리웠다. 가장 첫 장면에 나오는 무대를, 내가 노래하려고 갔다가 매번 실패했던 뉴욕의 한 바로 착각했다. 영화가 끝나고 10분간 휴식을 마치고, 다시 자유의 언덕을 봤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10명 정도였다.


영화가 끝났을 때는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출출했다. 다시 돈가스집에 가봤지만, 이미 영업이 끝난 상태였다. 조금 걷기로 했다. 여기저기 안 가본 골목골목을 걸었다. 나는 골목을 참 좋아한다. 뭔가가 은밀하게 숨어 있을 것 같고, 갑자기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도 느껴지고, 한 골목을 지나면 전혀 새로운 공간이 눈앞에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도 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평소보다 좀 더 많이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강릉역에 들러, 역 내부의 기류를 잠시 느끼며, 역이름들을 차근히 살펴보고 나왔다. 역 주위에는 붉은 네온사인을 켜둔 유흥가들이 즐비했고, 달이 너무 밝아 괜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경찰서까지 걸어오는 길에 아카시아인지 은행인지 분간할 수 없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버스 정류장에 멈춰, 다시 우쿠렐레를 꺼내 들었다.


남의 집 담장 너머의 희망과 자유를 노래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집에 들어와 늦은 저녁상을 받았다. 어머니의 담백한 밥상 앞에서 문득, 콩나물국 조리법이 궁금해졌다. 콩나물과 소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고 하셨다. 동생 방 피아노 위에 놓인 초콜릿에 눈이 갔지만, 조용히 눕기로 했다. 다시 시작해야겠지. 그게 뭐가 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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