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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준 Mar 14. 2024

멜리사, 멜로드라마틱 모나리자

음악 일기 / 뉴욕 / 2014. 10. 15 망원

신선생님이 보내준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와 재클린 뒤 프레의 첼로 연주를 들으며 아침을 열었다. 유튜브의 위대함을 다시금 실감하며.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사진 속의 나, 기억 속의 누군가는 여전히 그대로다.

 

4월이 왔고, 다시 거리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겨울의 외관을 좋아하지만, 봄의 가벼운 옷차림이 마음까지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소호 prince st의 짙은 녹색 벽의 건물 앞에 자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하늘은 약간 흐렸고, 시계 바늘은 어느새 오후 여섯 시를 가리켰다. 건너편 인도를 지나던 흑인여자가 길을 건너더니, 내 앞에 멈춰 선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여자는 박수와 함께 기타 케이스에 팁을 건넨다. 


'어디에 가면 니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니?'

'응, 노호 쪽 비터엔드라는 클럽'

'어, 나 거기 알아, 난 nyu 다니거든'

'아... 반가워'

'나도'


나는 눈인사를 하고, 다시 노래를 할 채비를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침 비가 내렸다. 영화처럼 갑자기.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고, 로맨틱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랑에 빠져도 될 만한 상황이었다. 나는 사랑에 빠지는 대신,

'커피?'라고 말했고, 그녀는 좋다고 했다.


커피집을 찾으러, 차이나 타운 언저리를 거닐다, 배가 고파져, 우리는 저녁을 먹기로 했다. 허름한 누들집에 들어갔고, 기름기로 얼룩지고,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주방장이 메뉴판을 가져다줬다. 식당에는 손님이 우리 밖에 없었다. 이름 모를 볶음 누들을 시켰다. 누들은 꽤 맛있었다. 물론, 타지에서의 생활은 음식의 감사함을 일깨워 줬고, 나는 대부분 허기가 져 있었기 때문에(정신적 허기가 더해져) 음식이 맛없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즐거웠고, 그녀는 나에게 낯선 무엇이었다.


저녁을 다 먹을 때쯤, 비는 그쳤고, 나는 그녀를 차이나 타운에 위치한 nyu 기숙사까지 바래다줬다. 가벼운 포옹과 함께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오다, 다시 뒤를 돌아봤더니, 그녀는 여전히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었고, 왠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 후 며칠간 나는 어학원을 옮기느라 바빴고, 그러던 중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뉴욕 대학 근처에서 어떤 모임이 있는데, 같이 가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나는 마침 일하지 않는 날이었고, 좋다고 했다. 내가 간 곳은, 일종의 저녁 예배 같은 자리였다. 대학생들이 모여 음식을 먹고, 기도를 하고, 성가를 부르는. 


아무튼, 그녀는 그녀 자신을 mixed라 말했고, 여기는 혼혈 친구들이 많이 온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흑인이었고,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이었다. 사실, 이 우주에 혼혈 아닌 인간이 있을까? 


그녀는 혼혈을 일종의 마이너 느낌으로 얘기했고, 그간 혼혈로 자라오면서 받아온 무언의 차별들을 토로하며, 회한에 젖은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노호의 4층 건물에서 바라보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그 밤, 도시의 풍경은 왠지 쓸쓸했지만, 깨끗해 보였다.


그녀를 세 번째 만나던 날, 기숙사 건물 아래 두 남녀는 한동안 서 있었다. 동양인 남자와 흑인여자,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키스를 해도 되냐고 물었고, 여자는 상기된 얼굴로 미소지으며 '다음에'라고 말했다. 


학습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나는 프렌즈나 섹스 엔더 시티 따위의 시트콤을 수십 번 반복해서 보면서, 영어 공부를 했고, 또 스토리까지 거의 완벽히 학습된 상태였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여자를 세 번 만나게 되면, 꼭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쌓여있었고,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키스를 해도 되냐는 질문을 해버렸다. 하지만, 여자는 너그럽게 이 남자 귀엽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에라는 희망적인 대답을 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결국 키스를 했으며, 나는 마치 키스의 매력에 빠진 20대 초반의 대학생처럼 그녀 기숙사 앞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녀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뉴욕의 밤거리를 거닐며, 신호등이 걸음을 멈출 때마다 서로의 입술을 부딪혔으며, 나는 그녀가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세 번째 종교 모임에 초대했을 때는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melisa였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자기 이름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듯이 소개했다.

나는 그녀를 melodramatic monarisa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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