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생순

금메달보다 더 빛났던 은메달의 가치

by 최종병기
흥행을 했더라도, 또는 비록 흥행하지 않았더라도
작품성을 인정 받은 영화든, 또는 그냥 저냥 식상한 영화라도
과거 OTT 영화 담당자로서 지난 영화를 돌아보며 가볍게 읽을만한 글로 소통합니다.


포스터.jpg 걸크러쉬라면 역시 2004년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


[2004년 8월 29일, 합주실 로비에서]

2004년 8월 29일 일요일, 직장인 밴드 합주를 마치고 나온 로비가 시끌벅적했습니다. 우리처럼 나가던 사람들이나 합주실에서 대기하던 사람들 모두의 발길을 멈추게 한 건, TV 속 여자 핸드볼 결승전이었습니다.

거구의 덴마크 선수들에게 밀려 넘어지면서도, 오뚝이처럼 악착같이 다시 일어나는 우리 선수들. 무려 19번의 동점과 120분의 혈투. 비록 승부 던지기에서 졌지만,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선수들을 보며 합주실에서 지켜보던 모두가 함께 울었습니다.

"스포츠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수 있구나." 그날 우리가 목격한 각본 없는 드라마는, 4년 뒤 진짜 영화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1.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Forever the Moment) 영화 정보


금메달보다 더 찬란하게 빛났던, 위대한 2등의 기록


감독: 임순례

주연: 문소리(미숙), 김정은(혜경), 김지영(정란), 조은지(수희), 엄태웅(승필)

개봉일/관객수: 2008년 1월 10일 / 401만 명 (스포츠 영화 붐의 시초)

스트리밍: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한 줄 평: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우리는 당신이 흘린 땀의 온도를 기억한다.


200357129_500.jpg 승리를 향한 의지를 보여주는 하이파이브





2. 왜 현실의 우리는 이 영화에 감동받는가


실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마주한 현실은 영화적 장치가 필요 없을 만큼 차갑고 혹독했습니다.


아래는 다소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각색된 영화 내용이 아닌 당시 보도와 널리 알려진 자료와 사진을 바탕으로 실제 현실을 간략히 정리합니다.


실화2.jpg 멋져요. 언니들!
기울어진 운동장: 저변의 큰 차이


숫자만 놓고 보면 당시 덴마크와 한국의 핸드볼 인프라 차이는 아예 비교가 민망할 수준이었습니다.


◎ 140,000명 vs 200명 (700배의 차이)

덴마크의 핸드볼 등록 선수는 약 14만 명. 핸드볼이 국기(國技)인 나라답게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클럽 시스템에서 자라납니다. 반면, 당시 대한민국에 등록된 엘리트 선수는 고작 2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 1,000개 클럽 vs 5개 실업팀
덴마크에는 1,000개가 넘는 클럽팀이 매주 프로 리그를 뛰며 실전 감각을 유지합니다. 반면 한국은 실업팀조차 해체 위기였고, 팀이 단 5개뿐이라 리그 운영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프랑스VS독일(파리올림픽).jpg
덴마크.jpg
(좌) 파리올림픽 독일 VS 프랑스 여자 핸드볼 , (우) 덴마크 여자 핸드볼의 인기


결국 한국의 주축 선수들은 뛸 팀이 없어 일본 리그로 떠나야 했고, 국내에 남은 선수들은 관중 없는 텅 빈 체육관에서 그들만의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14만 명 중 선발된 최정예 엘리트 군단과, 은퇴를 미루고 돌아온 '언니'들의 대결. 이것이 덴마크와의 2004년 결승전 시작점이었습니다.


모든 신체 조건의 열세: 높이와 나이의 벽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그 격차는 눈으로도 확연했습니다.


◎ 평균 신장 7cm의 차이 (175cm vs 168cm):

핸드볼에서 신장 7cm의 차이는 팔 길이를 생각하면 10cm 이상의 차이입니다. 덴마크 선수들이 팔을 뻗어 만드는 수비 벽은 우리 선수들에게는 거대한 성벽과도 같았습니다. 덴마크 팀의 신장보다도 더 큰 체격의 차이로 한국 팀의 언니들은 몸싸움에서도 계속 밀리며 나동그라지는 장면이 반복되었습니다.

게임.png 한발자국 더, 조금 더 높이 뛰어야 열세를 극복할 수 있어요.


◎ 평균 연령 3살의 차이 (27.5세 vs 30.3세):

덴마크는 20대 중후반, 체력과 기술이 절정에 달한 전성기의 선수들이었습니다. 반면 한국은 평균 나이 30.3세. 서른을 훌쩍 넘긴 노장들이 주축이었습니다. 스포츠 과학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에이징 커브'를 그들은 오직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 결승까지의 여정


결승전에 오기까지의 여정은 그야말로 '꽃길'과 '가시밭길'의 차이였습니다.


덴마크는 결승까지 상대적으로 편하게 올라왔습니다. 8강전에서 주전을 빼는 여유 속에 중국을 4점 차(32:28)로 여유 있게 따돌렸고, 4강전에서는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무려 9점 차(29:20) 대승을 거뒀습니다.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충분히 비축하며 '산책'하듯 결승에 안착했습니다.


반면 한국은 매 경기가 '지옥'이었습니다. 8강전부터 난적 브라질을 만나 거친 몸싸움 끝에 겨우 2점 차(26:24)로 겨우 이겼고, 4강전에서는 당시 세계 최강 프랑스를 상대로 피 말리는 접전 끝에 1점 차(32:31) 신승을 거뒀습니다. 이미 결승전에 오기 전부터 한국 선수들의 무릎 연골은 닳고 구석구석 부상을 입었으며 체력은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20분의 사투, 그리고 "언니들의 투혼"


그렇게 맞이한 덴마크와의 결승전.

전후반 60분, 연장전과 재연장전까지 무려 120분 동안 19번의 동점과 역전이 반복되는 피 말리는 시소게임.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체력과 유럽 심판들의 애매한 판정까지 영향을 주었던 텃세 속에서, 선수들을 지탱한 건 전술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전우애'였습니다.


쓰러지면 서로의 찢어진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쥐가 난 다리를 주물러주며, "조금만 더 버티자", "언니가 막을게"라며 서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사실상 스포츠가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듯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오직 '악'과 '깡'으로 버텨내며 몸을 던졌던 그 처절한 사투,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함께 부등켜 안고 눈물을 쏟던 아쉬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지막.jpg
마지막2.jpg
새하얗게 불태우고 뜨거운 눈물





3. 이 영화, 볼까 말까? (관람 가이드)


저는 이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극복하기 힘든 열세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온몸을 던져 쓰려저도 다시 일어나는 근성으로 상대도 고개를 흔들 수 밖에 없었던 그 끈기와 투지를 떠올립니다.


마지막 승부 던지기(승부치기)까지 가서야 끝난 이 경기.

열세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 국가대표팀의 모습을 TV로 지켜보았던 국민에게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과 희망을 선사했습니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숨 막히는 언니들의 투혼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분들에게 강력 추천 (O)


◎ "과정의 가치를 믿고 싶어"

결과보다 더 아름다운 과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분. 세상의 편견에 맞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모든 '미생'들에게 바칩니다.


◎ 리얼한 스포츠 영화 덕후

실제 배우들이 대역 없이 소화한 핸드볼 경기 장면은 지금 봐도 소름이 돋습니다. 임순례 감독 특유의 담백하고 사실적인 연출을 좋아하는 분.


◎ 진한 워맨스(Womance)

문소리, 김정은, 김지영, 조은지 등 네 배우가 보여주는 찐득하고 억척스러운 자매애를 보고 싶은 분.


이런 분들은 패스하세요 (X)


◎ 무조건 해피엔딩파

"주인공은 무조건 이겨야 해!"라고 생각하는 분.

씁쓸하고 현실적인 결말을 견디기 힘든 분들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 핸드헬드 기법 불호

다큐멘터리 느낌을 내기 위해 카메라가 많이 흔들립니다.

멀미가 심하신 분들은 큰 화면보다 작은 화면으로 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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