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세뱃돈 횡령 사건

'맡아줄게'로 시작되는 엄마의 완전 범죄

by 최종병기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두툼해진 아이들 주머니와 얇아진 어른 지갑이 교차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명절이 끝나면, 매년 어김없이 ‘범인은 있는데 증거는 없는’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름하여 엄마의 세뱃돈 횡령 사건입니다. 그리고 범행 수법은 어떤 가정이든 대체로 비슷합니다.


“잃어버리니까 엄마가 맡아줄게.”




1.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 "맡아줄게"


나는 명절이 되면 외가, 친가가 있는 부산으로 갑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고모 삼촌 등... 열심히 인사하고 세배를 합니다. 그렇게 받은 500원, 1천원... 주머니에 꼬깃 꼬깃 넣어 혹시나 잃어버렸을까 꺼내보고 세어봅니다. 그리고 열심히 웃음(?)과 인사를 팔아 모으고 모은 1만원, 단위가 바뀔 때 가슴이 벅찹니다.


어린 시절 큰 돈이었던 1천원


빳빳한 신권(새 돈). 그 돈을 쥐고

"이걸로 로봇을 살까, 딱지를 몇 장이나 살까? 빼빼로를 먹을까?" 도톰한 바지 주머니를 어루만지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습니다.


사건은 늘 똑같은 패턴으로 일어납니다.

그녀가 다가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이죠.


"아들, 그거 들고 다니면 잃어버려. 엄마가 '맡아' 줄게."


주목해야 할 단어는 '맡아'입니다. 그녀는 결코 '가진다'거나 '쓴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보관만 해주겠다는 그 말.


혹시 잃어버릴까 불안한 마음, 순진했던 동심은 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습니다.

마치 은행에 예금하듯 고사리손으로 애지중지 모은 돈을 넘겼죠.

그것이 그 돈과의 마지막 작별인 줄도 모른 채 말입니다.




2. 완전 범죄의 현장


몇 달이 흘러 5월 어린이날이나 생일이 다가옵니다. 드디어 맡겨둔 돈을 찾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엄마에게 당당히 요구합니다.


"엄마, 그때 내 세뱃돈 줘. 나 맛있는 거 사먹게"

그때 돌아오는 답변은 충격적입니다.


그 시절 가지고 싶었던 로보트


"그거? 너 학교 갈 때 옷 사 입었잖아. 네가 먹은 밥값이 얼만데!"


아니, 세상에. 자식이 먹고 입는 비용을 내 코 묻은 세뱃돈에서 차감하다니요.

장부도 없고, 영수증도 없습니다. 입금 기록은 분명 내 머릿속에 있는데, 출금은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오히려 '마이너스 통장'이라며 핀잔까지 듣습니다. 항소할 곳도 없는 완벽한 완전 범죄였습니다.




3. 세뱃돈의 경제학: '제로섬 게임'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내가 받은 세뱃돈의 실체는 내 '소득'이 아니라, 엄마아빠 지갑에서 나간 돈의 '회수'였다는 것을요.


친척들이 나에게 천원을 주면, 우리 부모님도 그 집 아이에게 천원을 줘야 합니다. 결국 어른들끼리 돈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잠시 내 손을 거쳐 갔을 뿐, 그 돈은 애초에 우리 집 생활비로 환원되어야 할 운명이었던 겁니다.


월급은... 아니 세뱃돈은 잠시 스칠 뿐...


일종의 '가족 간 통화 스와프(Currency Swap)' 현장이었던 거죠.


그걸 모르고 "내 돈 내놔라"며 바닥을 구르며 울었으니, 엄마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요.

(아마 속으로 '저걸 확...' 하셨겠죠?)




4. 가해자가 된 피해자


세월이 흘러 나도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설날, 아이가 받은 세뱃돈 봉투를 보며 저도 모르게 똑같은 대사를 읊고 있더군요.


"아들, 그거 잃어버리니까 아빠가... 아니, 엄마가 '맡아' 줄게."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그 눈빛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납니다.

'아, 우리 엄마도 그때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결국 이 사건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며 끝없이 되풀이되는, 슬프고도 웃긴 '내리사랑(?)의 굴레'인가 봅니다.


오늘 저녁, 혹시 어머니와 통화하신다면 넌지시 한번 물어보세요.

"엄마, 근데 그때 그 돈... 이자는 붙고 있는 거지?" 라고요.


아마 등짝 스매싱이 날아오겠지만, 그래도 웃음꽃은 피어날 겁니다.





� 그때 그 시절 TMI - 국민학생 '세뱃돈'의 국룰


1. "천 원짜리 한 장이면 세상을 가졌다"


요즘 애들은 5만 원짜리(신사임당)를 줘야 웃지만, 라떼는 달랐습니다. 초등학생 국룰은 1,000원(퇴계 이황)이었습니다. 빳빳한 보라색 천 원짜리 한 장이면 문방구에서 떡볶이 먹고, 오락실 가고, 쫀드기까지 사 먹는 '풀코스'가 가능했죠. 가끔 5,000원(율곡 이이)이나 10,000원(세종대왕)을 주시는 '큰손' 친척이 오시면, 그날은 온종일 그분을 "가장 존경하는 어른"으로 모셨습니다.

(사실 지금도 특별히 둘째 이모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 엄마 은행의 '기적의 논리' (Feat. 의식주)

엄마에게 돈을 뺏길 때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핑계 3대장이 있습니다.


① "너 학교 갈 때 입을 옷 사야지." (내가 사달라고 안 했음)

② "너 학원비 내야지." (내가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거 아님)

③ "너 밥 먹여 살리는 돈이야." (이건... 반박 불가)


엄마 은행은 예금 금리가 없는 것도 모자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활비' 명목으로 원금이 자동 소멸되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3. 우리가 그 돈으로 사고 싶었던 것들

만약 그 돈을 뺏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요? 남자아이들의 로망은 단연 84태권브이나 다섯 사자들의 합체 로봇 킹라이온(골라이온) 또는 '미니카'였습니다. (특히 르망 모터나 블랙 모터 달면 학교 짱 먹음)


합체 로봇은 정말 비쌌단 말이에요.


여자아이들은 예쁜 '다이어리'나 '종이 인형 세트'를 사는 게 꿈이었죠.

하지만 현실은 문방구 앞 '뽑기' 몇 번 하거나, '아폴로' 빨아먹으며 씁쓸함을 달래야 했습니다.


※ 이미지 출처

① 구권 천원 : 나무위키
② 84태권브이 : https://m.toymaru.com/product/뽀빠이과학-84-태권브이-완구-복원판/43964
③ 세배 사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802
④ 킹 라이온 : https://m.ruliweb.com/hobby/board/300110/read/49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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