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평화의 댐, 물바다의 공포

한장의 CG가 만든 모금의 시간

by 최종병기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야, 너 뉴스 봤어? 북한이 만든 금강산 댐을 터뜨리면 63빌딩 허리까지 잠긴대!"

"진짜? 우리 집은 1층인데 그럼 나 죽는 거야?"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서울 전체가 물바다 된대. 빨리 도망가야 한대."


1986년 가을, 국민학교 교실은 쉬는 시간마다 공포와 놀라움에 질린 아이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당시 기껏 5층짜리 상가나 아파트만 본 국민학생에게 '63빌딩'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발전의 상징이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죠. 그런데 9시 뉴스에서 나온 컴퓨터 그래픽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시퍼런 물이 63빌딩을 집어삼키고 국회의사당 지붕만 남는 장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빌딩 63빌딩이 저렇게 잠긴다니요!!!


그건 전쟁보다 더 무서운, 현실로 다가온 '물폭탄'의 공포였습니다.





1. "고사리손도 나섭니다" 전 국민 모금 생방송


공포는 곧 거대한 '움직임'으로 이어졌습니다.

TV를 틀면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평화의 댐 건설 모금 생방송>을 해댔습니다.


화면 속에는 유사한 풍경이 반복되었습니다. 방송국 앞 광장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줄이 길게 늘어서고, 양복 입은 아저씨부터 유치원 가방을 멘 아이들까지 모두 봉투와 저금통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고사리 같은 아이들도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참합니다.


아나운서 아저씨가 마이크를 들이댑니다.


"아유, 우리 어린이는 어디서 왔어요?"

"저기... 상계동에서 왔는데요. 제 저금통 털어서 나라 구하려고 왔어요."

"세상에, 정말 장하네요! 이 고사리 같은 손 좀 보세요!"


그 방송을 보며 우리는 비장해졌습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도 심각한 표정으로 칠판에 '평화의 댐 성금'이라고 적으셨습니다.


그 시절 500원이면 떡볶이를 배 터지게 먹고 오락실에서 한 판 50원인 보글보글을 열 판이나 할 수 있는 거금이었지만, 63빌딩이 잠긴다는데 떡볶이나 오락이 문제겠습니까?


그 시절의 빨간 돼지 저금통...


우리는 빨간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갈랐고, 어떤 친구는 천 원짜리 지폐를 가져와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라를 구한다는 일념으로 코 묻은 돈을 모금함에 털어 넣었습니다.




2. 어른들의 속사정 '가짜 물폭탄'


시간이 흐르고 뉴스의 문장을 의심하며 그 시절의 일들을 묻기 시작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1986년과 1987년, 대한민국이 민주화의 열망으로 가장 뜨겁게 타오르던 시기, 거리에 나온 시민들의 함성과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던 그 시절.



누군가는 그 뜨거운 거리의 열기와 긴장의 불꽃을 끄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더 강력한 물폭탄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북한이 200억 톤 물폭탄을 터뜨린다."


어른들은 과장된 공포를 조장했고 많은 이들이 그 공포에 속아 성금을 냈습니다.


결국 국민들의 시선을 댐으로 돌리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거짓으로 쌓은 댐이 진실을 영원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천문학적인 돈이 진짜 댐을 짓는 데 다 쓰였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3. 여전히 씁쓸한 63빌딩


가끔 여의도를 지나며 멀쩡하게 서 있는 63빌딩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어린 마음에 느꼈던 그 공포와 나라를 구하겠다고 저금통을 들고 방송국 앞에 줄을 섰던 그 순수했던 사람들의 표정, 지금 와서 보면 한 편의 거대한 블랙코미디였지만,


나의 소중한 500원과 1,000원이 어른들의 이해관계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씁쓸합니다.

그때 우리가 냈던 건 단순한 돈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동심'이자 '믿음'이었으니까요.




� 그 때 그 시절 TMI : 응답하라! 평화의 댐


1. 63빌딩 절반이 잠긴다? (공포의 CG)


당시 TV 뉴스에서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방류하면 12시간 만에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보도했습니다. 국회의사당 지붕만 남고, 63빌딩은 허리까지 잠기는 모의실험 화면을 뉴스에서 보여줬죠. 훗날 전문가들은 "그 정도 물이 내려오려면 북한 전역이 먼저 물바다가 되어야 한다"며 과학적 근거가 희박했다고 밝혔습니다.


2. 코 묻은 돈이 모여 661억 원


당시 모금된 성금의 총액은 약 661억 원(정도라고 추정된다고 합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수천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기업들의 강제 모금도 있었지만, 코흘리개들의 저금통과 ARS 성금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죠. 결국 이 돈으로 댐을 짓긴 했지만, 1989년 공사는 중단된 후 오랫동안 흉물로 방치되기도 했습니다.


3. 아이러니한 반전


재밌는 건, 사기극으로 시작된 이 댐이 훗날 진짜 홍수를 막아냈다는 점입니다. 2000년대 들어 북한의 무단 방류나 집중 호우 때 평화의 댐이 물을 가둬 화천 지역의 홍수 피해를 막은 적이 있습니다. 거짓말처럼 지어진 댐이 결국 밥값을 하게 된, 웃지 못할 역사의 아이러니죠.


※ 이미지 출처

① 63빌딩 : https://skyscrapercenter.com/building/kli-63-building/891
② 물에 잠긴 63빌딩 CG : 나무위키(평화의 댐)
③ 전국 모금 방송 :
https://www.ehistory.go.kr/view/photo?mediaid=9487&mediasrcgbn=PT
④ 1987년 6월 시위 사진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428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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