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 of Sight, Out of Mind를 처음 배운 그 시절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매년 2월 중순, 겨울방학이 끝나고 잠시 학교에 나갔다가 다시 봄방학으로 넘어가기 직전인 종업식 날.
왜인지 떠날 교실을 더 깨끗하게 청소하라는 선생님의 독려에 왁스 칠을 갓 마친 나무 바닥 냄새가 유독 코를 찌르던 그날의 교실은 늘 어수선했다.
1년 동안 정들었던 선생님과 헤어진다며 책상에 엎드려 훌쩍이는 여자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교실을 채웠지만,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었다. 내 신경은 오직 교탁 위, 선생님이 들고 있는 얇은 종이 뭉치에만 쏠려 있었다.
쉬는 시간 내내 우리들의 대화는 온통 새 학년 반 배정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야, 5학년에 몽둥이 들고 다니는 호랑이 선생님 있다며. 그 반 걸리면 진짜 죽음이야."
"양문환 선생님이 애들한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엄청 착하다던데, 난 무조건 그 선생님 반 갈 거야."
사실 5학년 그 선생님이 동일한 5학년을 맡는다는 보장도, 심지어 우리와 같이 4학년에서 5학년으로 올라가는 케이스도 거의 없다는 걸 알 턱이 없는 4학년 꼬맹이들의 철딱서니 없는 바람이었다.
어떤 녀석은 엉뚱하게도 TV 드라마 <5학년 3반 청개구리>를 들먹이며
"난 무조건 5학년 3반 될 거야! 3반이 제일 재밌을 거잖아"라며 김칫국을 마셨다.
하지만 그 모든 소란 속에서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1번 김OO 3반, 2번 이OO 5반…"
번호순으로 호명되는 새 학년 반 배정표. 나는 의자 뒤로 슬쩍 손을 뻗어 내 뒷자리에 앉은 단짝 원보의 손을 꽉 잡았다. '제발, 제발 같은 반.'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야속하게도 내 기도는 조금도 하늘에 닿지 않았다. 내 번호가 불리고, 이어서 뒷자리 친구의 번호가 불리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5반과 13반. 층수마저 다를 게 뻔한, 복도 끝과 끝의 숫자였다. 문제는 머리 잡아 당기며 놀려 울린 적이 있었던 지영이와는 같은 반이 되었다. 나와 같은 반이 된 것을 안 지영이도 나를 째려보며 씩씩 거렸다.
선생님은 평소 우리 둘이 얼마나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녔는지 뻔히 알면서도, 각자의 반을 부르며 얄궂게 씩 웃으셨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묘한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선생님이 일부러 우리를 갈라놓은 게 틀림없어!' 어린 마음에 선생님의 펜 끝이 우리 우정을 무 자르듯 갈라놓은 절대 권력처럼 원망스러웠다.
우리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말도 안 되는 위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 그냥 우리 엄마한테 말해서 둘 다 옆 동네 학교로 전학 가면 안 되나? 그럼 같은 반 될 수도 있잖아."
"우리 집도 안 먼데 반 달라도 매일 놀면 돼. 학교 끝나면 윤희네 가게 옆 '제일 문방구'에서 무조건 만나는 거다. 거기서 보글보글 오락 같이 하면 되잖아."
"그래, 이번 주말엔 우리 집에 놀러 와. 엄마 몰래 가스레인지 불 켜서 ♩빙그레 라면 이라면~♪ 끓여 먹자."
CF에서 나온 주현미의 '빙그레 라면 이라면~'이라는 멜로디를 붙여 원보가 이야기했다.
당장 내일 세상이 끝날 것처럼 슬퍼하면서도, 우리는 거리가 멀어져도 마음만은 영원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3. 멀어진 교실, 희미해지는 세계
3월의 새 학기가 시작된다. 낯선 교실, 낯선 짝꿍, 그리고 새로운 무리들.
처음 며칠은 쉬는 시간 종이 울리기 무섭게 먼 복도를 달려가 13반 뒷문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게도 새로운 짝꿍이 생기고, 새 교실 안에서 지우개 따먹기와 딱지치기 무리가 새로 짜이면서 우리의 세계는 빠르게 분리되었다. 종이 울리면 13반까지 숨차게 뛰어갈 시간에, 당장 내 앞자리에 앉은 새로운 친구와 쉬는 시간 도시락을 까먹으며 서로 반찬 품평을 하는 것이 훨씬 즐거워졌다.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복도의 길이만큼, 교실의 층수만큼 조용히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덧 봄이 짙어지던 시간, 층이 달라 마주치지 못하던 원보를 복도 한가운데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마주쳤다. 작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물을 튀기며 장난을 쳤을 텐데,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동작을 멈췄다.
"어… 안녕. 잘 지내?"
"어, 그래. 너도."
허공을 맴도는 시선. 우리는 어색하게 손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고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각자의 교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서글펐지만 차마 다시 뒤돌아 잡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멀어진 건 친구만이 아니었다. 우리를 갈라놓았다며 원망했던 담임 선생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새 학기 첫 주만 해도 나는 옛정을 잊지 못해 굳이 옛 담임 선생님이 새로 맡은 교실을 찾아가 빼꼼히 인사를 건네곤 했다. 선생님도 반갑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복도에서 마주쳤을 땐 그저 "어, 안녕" 하는 가벼운 인사로 바뀌었고,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엔 멀리서 서로 눈이 마주쳐도 쭈뼛거리며 대강 고개만 끄덕이고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나를 그토록 아껴주던 선생님이었는데, 영원할 줄 알았던 내 최고의 단짝이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한순간에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게 되었을까? 지금이라면 반갑게 손 잡고 안았을텐데.
새로운 인연이 생기면 예전의 인연은 자연스레 옅어진다는 것. 공간이 분리되고 매일 공유하던 세계가 달라지면, 영원할 것 같던 맹세도 물리적인 거리와 함께 희미해진다는 것.
우리는 그 서글픈 이별의 공식을, 2월의 매정한 종업식과 5월의 어색한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프게 배워가고 있었다.
※ 이미지 출처
① 5학년 3반 청개구리들 :
https://www.yetnal.co.kr/shop/item.php?it_id=1667805341
② 이라면 :
https://www.youtube.com/watch?v=BG23UgZTHtQ
③ 문방구 오락 :
https://wqwq.tistory.com/329
④초등학교 복도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