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을 버리고 자존감을 세워라
사마천의 <사기열전> 속 인물들을 21세기 비즈니스 정글로 소환합니다. 현대 경영학 이론과 실제 비즈니스 현장의 생생한 에피소드를 버무려, 오늘 당신이 회사와 가정에서 마주할 문제들에 대해 '2,000년 전 꼰대'들이 날카로운 훈수를 둡니다.
사기(史記)로 삶의 통찰과 함께 나를 지키고 위로를 얻으세요.
"일은 잘 하는 건 똑똑한 사람이지만, 그 일을 하게 만드는 건 따뜻한 사람이다."
차가운 계산기와 성과 지표가 지배하는 회사. 하지만 결국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는 건 사람의 손이고, 그 손을 움직이는 건 마음입니다. 2,000년 전, 능력 하나 없는 흙수저가 천하를 얻고, 패장이 적장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비결. 그것은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에 있었습니다. 사람을 얻는 가장 확실한 기술, '마음의 온도'를 높이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진짜 권위는 가장 낮은 곳에서 완성된다)
어느 회사의 '타운홀 미팅' 날이었습니다. 회사의 현안과 앞으로의 방향성, 그리고 문제점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라고 공지가 되었죠. 직원들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강당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마이크를 잡고 단상에 올라온 본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소통'이 아니라 '호통'이었습니다. 그는 회사의 비전 대신 본인이 마음에 안 드는 내용만 잔뜩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죠.
"지난달 목표도 미달성해놓고, 대체 여러분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 줄 압니까? 제발 긴장 좀 하고 삽시다!"
심지어 입에 담기 힘든 욕설까지 섞어가며 직원들을 몰아세웠습니다. 일장연설이 끝나자 사회자가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잡고 물었습니다.
"자, 그럼 이 내용에 대해 의견 있으신 분 계십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용기 있게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투명하게 공유하겠다던 자리는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었고, 직원들은 모멸감을 느끼며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죠.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 본부장의 과거였습니다. 그는 주니어 시절, 누구보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불합리한 시니어들에게 당돌하게 들이받던 '자유로운 영혼'으로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새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불통의 아이콘'이 되어, 단상 위에서 군림하고 있었던 겁니다.
직급이 올라가면 목과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는 걸까요? 여기, 정반대의 선택으로 진짜 권위를 보여준 2,500년 전의 한 남자가 있습니다.
전국시대, 위나라 왕의 동생인 신릉군(위무기)은 당대 최고의 '금수저'였다. 하지만 그는 왕족의 권위를 내세우는 대신, 기꺼이 자신을 낮춰 사람을 얻을 줄 아는 남자였다.
어느 날, 신릉군은 성대한 연회를 열고는 직접 마차를 몰고 성의 동쪽 문을 지키는 칠순의 늙은 문지기, 후영을 모시러 갔다. 왕의 동생이 늙은 문지기의 '마부'를 자청한 것이다. 그런데 후영의 태도가 가관이었다. 그는 낡은 옷을 입은 채 사양도 없이 마차의 상석인 왼쪽 자리에 털썩 앉더니, 대뜸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친구가 저기 시장통 푸줏간에 있는데, 가는 길에 들러서 인사나 하고 갑시다."
보통 귀족이라면 화를 냈겠지만, 신릉군은 군말 없이 마차를 시장으로 몰았다. 후영은 푸줏간 친구인 백정 주해와 잡담을 나누며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었다. 시장 사람들은 왕의 동생이 고삐를 잡고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구경했고, 수행원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하지만 신릉군의 표정은 온화했다. 그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그들의 수다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이날의 파격적인 겸손은 훗날 역사적인 '반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몇 년 뒤, 이웃 동맹국인 조(趙)나라가 최강국 진나라의 침공으로 멸망 위기에 처했다. 조나라에는 신릉군의 친누이가 시집가 있었기에 다급한 구원 요청이 당도했다. 하지만 정작 위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안리왕(신릉군의 이복형)은 진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구원군의 진격을 멈추고 관망만 하고 있었다.
동맹국과 혈육이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신릉군은 결국 왕의 허락 없이 위나라 정규군의 지휘권을 빼앗아 조나라를 구하러 가기로 결심한다. 자칫 반역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그때, 그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 다름 아닌 문지기 후영과 백정 주해였다.
후영은 왕의 침실에서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호랑이패(병부)를 훔쳐내는 기막힌 작전을 짰고, 백정 주해는 신릉군의 호위 무사로 따라나섰다. 호랑이패를 들고 위나라 장군 '진비'의 진영에 도착했지만, 진비는 "왕의 직접적인 확인 전에는 군대를 내줄 수 없다"며 버텼다. 신릉군의 작전이 실패하고 당장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그림자처럼 서 있던 백정 주해가 벼락같이 나섰다. 그는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40근(약 10kg)짜리 무쇠 철퇴를 꺼내 단 일격에 장군 진비를 때려죽이고 군 지휘권을 강제로 가져왔다.
"장군이 왕의 증표를 보고도 명령을 듣지 않으니, 내가 공자를 대신해 처단하겠소!"
시장통에서 고기나 썰던 천한 신분의 백정이, 왕족인 신릉군을 위해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는 영웅이 된 것이다. 만약 신릉군이 시장바닥에서 마차를 멈추고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주해의 철퇴는 결코 신릉군을 위해 춤추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처음에 이야기했던 '타운홀 미팅'으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흔히 '수평적 문화'를 외칩니다. 이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의견을 가감 없이 경청하고 반영하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많은 리더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수평적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리더가 스스로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Step 1의 본부장처럼 모든 책임을 구성원들에게 돌리며 목소리를 높이고, '월급'을 무기로 권위를 내세우는 리더. 과연 이런 사람이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고, 위기의 순간에 자발적인 희생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현대 경영학의 구루이자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창시자인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Greenleaf)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리더가 이끄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타인을 섬기려는 마음이 먼저다. 진정한 권위는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섬김을 받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신뢰에서 나온다."
만약 신릉군이 왕족의 권위를 앞세워 "감히 천한 것들이 나를 기다리게 해?"라고 호통을 쳤다면 어땠을까요? 백정 주해의 철퇴는 적장(진비)의 머리가 아니라, 신릉군의 뒤통수를 향했을지도 모릅니다. 주해가 휘두른 40근짜리 철퇴의 무게는 단순한 쇳덩어리의 무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 같은 하찮은 사람을 위해 기꺼이 고삐를 잡아주었던 신릉군에 대한 '존경의 무게'였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단상 위에서 마이크를 잡았을 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의전 차량의 뒷좌석이나 화려한 명함에 있는 것도 아니죠. 오히려 단상 아래로 내려와 구성원들과 눈을 맞추고, 기꺼이 그들의 마부가 되어줄 때 생겨나는 법입니다.
누군가에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이만큼 컸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높아지려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끌어내리고, 내가 낮아지려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떠받듭니다.
오늘, 혹시 누군가에게 지시를 하거나 대화를 할 때 나도 모르게 '목에 깁스'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보세요. 그리고 식당에서,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사무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는 건 어떨까요?
"진짜 어른은 대접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낮아짐으로써 스며들 뿐이다."
신릉군이 잡았던 마차의 고삐처럼, 오늘 하루 당신의 자존심은 내려놓고 상대방의 자존감을 세워주세요. 그때 비로소 당신을 위해 기꺼이 철퇴를 들어줄 '진짜 내 편'이 생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