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리는 놈보다 맞는 놈이 위대하다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1990년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 교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교실은 거대한 '링'으로 변모합니다.
"야! 내가 헐크 호건 할 테니까, 네가 얼티밋 워리어 해!"
벌써 칠판 앞 명당을 차지한 동진이가 소리를 지릅니다. 양희는 익숙한 듯 운동화 끈을 팔뚝에 둘러 묶으며 워리어의 '팔뚝 끈'을 흉내 냅니다. 책상은 이미 저만치 치웠고, 바닥에 깔린 먼지 쌓인 마루판은 선수들이 몸을 던질 매트입니다.
"간다! 스크류 드라이버!"
동진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민수의 허리를 껴안고 번쩍 들어 올리려 낑낑댑니다. 기술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대강 엉거주춤 매달려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우와!" 하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양희는 기술을 당하는 척하며 일부러 과장되게 비틀거립니다.
"이번엔 내가 보여줄게! 로프 반동이다!"
양희가 동진이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교실 뒷벽을 향해 휙 던집니다. TV 속 헐크 호건처럼 지훈이가 벽에 맞고 탄성 있게 튕겨 나와 래리어트를 맞아주길 기대하면서 말이죠.
(쿠당탕!)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양희의 손을 떠난 동진이는 로프에 튕기기는커녕,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교실 뒤편 청소 도구함과 먼지떨이 더미 속으로 거침없이 박힙니다.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친구를 보며, 던진 민수가 더 당황해서 소리칩니다.
"야! 너 왜 안 돌아와! 로프 반동 했잖아! 왜 거기서 자빠져 있어!!"
청소 도구함을 기대 앉은 동진이가 억울한 표정으로 기어 나옵니다.
"야, 이 바보야! 교실 벽이 무슨 로프냐? 아우, 등짝이야!"
그 시절 우리에게 프로레슬링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교실 바닥에서 서로의 몸을 내던지던 뜨거운 '우정의 증명'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는, 하지만 그때는 너무나 진지했던 프로레슬링 속 과학적 미스터리들을 소환해 봅니다.
30분 내내 두드러 맞아서 일어설 힘조차 없던 선수가, 상대방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휙 던지면 갑자기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전력 질주를 합니다. 그리고 로프에 튕겨서 다시 상대방의 품(?)으로 얌전하게 돌아와 주죠. 어릴 땐 "로프에 탄성이 있어서 튕겨 나오는구나"라고 믿었지만, 스스로 달려가서 돌아오는 그 성실함은 국민학생들의 최고의 불가사의였습니다.
링 밖으로 떨어진 상대방을 향해 링 위에서 화려하게 몸을 날리는 공중기(플라잉 기술). 그런데 자세히 보면, 링 밖에 있는 선수는 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날아오는 선수가 다치지 않게 두 팔을 벌리고 비틀거리며 타이밍을 맞춰 '잘 받아줄 준비'를 합니다. 때로는 혼자가 아니라 세 네 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날아오는 선수를 안전하게 받아내는 훈훈한 협동심(?)을 보여줍니다.
태그매치에서 실컷 맞은 선수가 우리 편 코너로 기어갈 때는 중력이 10배쯤 강해집니다. 평소엔 링을 펄펄 날아다니는 선수가 코너까지 2미터를 기어가는 데는 몇 분이나 걸리죠. 하지만 우리 편과 손을 마주치는(태그) 순간, 들어온 선수는 체력 100%의 무적 상태로 변신해 링을 쓸어버립니다.
무한도전 레슬링 특집에서 정형돈 씨가 뇌진탕 증세를 겪으며 보여주었듯, 레슬링은 '때리는 사람'의 뼈를 깎는 희생이 동반됩니다. 탑 로프에서 뛰어내리며 상대에게 헤드벗(박치기)이나 플라잉 엘보우 드롭을 날리는 기술을 보십시오. 상대방의 배를 때리는 공격이지만 공격자는 자신의 온몸(등과 허리, 머리)을 1미터 높이에서 맨바닥(링)에 스스로 내리꽂는 엄청난 충격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실상 공격자가 자기 몸을 부숴서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셈입니다.
결국 프로레슬링은 때리는 자의 '안전한 기술'과 맞는 자의 '헌신적인 접수(리액션)'가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과격한 예술이었습니다.
프로레슬링 심판들의 시야각은 놀라울 정도로 좁습니다. 악역 선수가 대놓고 반칙을 준비할 때면, 귀신같이 악역 매니저가 에이프런(링 가장자리)에 올라와 심판에게 말을 겁니다. 심판이 매니저와 말싸움을 하는 그 10초 동안, 링 안에서는 파이프 의자로 내려찍고 눈을 찌르는 온갖 불법 행위가 난무하죠. 선역(헐크 호건이나 얼티밋 워리어)이 억울하게 두들겨 맞고 있을 때면, TV 앞의 초등학생들은 "아저씨 뒤 좀 보라고!!"라며 울화통을 터뜨렸습니다.
초딩 시절 제게 세상의 불공평함을 처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WWF 심판들이었습니다.
1. 링 바닥은 트램펄린이 아니다 (충격의 링 구조)
TV로 볼 때는 링 바닥이 방방이(트램펄린)처럼 푹신해 보였죠. 하지만 링의 뼈대는 강철 프레임과 두꺼운 나무 판자이고, 그 위에 얇은 매트 한 장이 깔려 있을 뿐입니다. 선수들이 기술을 맞고 떨어질 때 나는 "꽝!" 소리는 과장이 아니라 진짜 나무판자에 뼈가 부딪히는 소리입니다. 푹신할 줄 알고 침대에서 따라 하던 초딩들이 바닥에 떨어져 울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2. 피 흘리는 마술, '블레이드 잡(Blade Job)'
철제 의자로 머리를 맞고 피를 철철 흘리던 선수들, 진짜 다친 걸까요? 사실 선수들은 손목 테이핑이나 심판의 손을 통해 몰래 건네받은 아주 작은 면도날 조각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의 타격을 받는 순간, 자신들의 이마를 살짝 그어 피를 내는 고도의 기술(블레이딩)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마를 긋는 것도 굉장히 아플 것 같아요. 다른 속임수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3. 심판은 장님이 아니라 '현장 감독'이다
반칙을 못 보던 야속한 심판 아저씨들. 사실 그들은 링 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입니다. 선수들에게 남은 방송 시간을 알려주고, 다음 기술의 타이밍을 전달하며, 선수가 진짜 다쳤는지(각본인지 실제 상황인지)를 확인하는 인이어(In-ear)를 낀 현장 디렉터였습니다. 반칙을 못 본 척하는 것도 그들의 위대한 연기력이었던 셈이죠.
※ 이미지 출처
① 레슬매니아 :
https://prowrestlingstories.com/pro-wrestling-stories/hulk-hogan-ultimate-warrior/
② 마초맨 엘보우 :
https://www.reddit.com/r/SquaredCircle/comments/w2ym5o/an_appreciation_post_for_macho_man_randy_savages/
③ 레프리 : https://tvtropes.org/pmwiki/pmwiki.php/Main/EasilyDistractedReferee
④ 무한도전 정형돈 : https://www.mk.co.kr/news/culture/4773051
⑤ 출혈 :
https://www.voicesofwrestling.com/2022/08/03/ric-flairs-last-match-july-31-results-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