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안방 상영관 VTR(上)

어느 날 우리 집에 '야생마'가 들어왔다

by 최종병기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때는 바야흐로 아날로그의 향기가 진동하던 80년대 후반.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과 손을 잡고 시장 나들이를 나섰던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길바닥에서 반짝이는 지폐 한 장이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아빠가 무릎을 굽혀 바닥을 한 번 쓸더니 손을 확인하고 으하하 하고 웃는 겁니다.

아빠의 손에 들려 있던 건 바로 5천 원. 바닥에 떨어진 5천원을 주운 겁니다!

당시 5천 원이면 짜장면이 500~600원 하던 시절이니, 그야말로 '횡재'였죠.





1. 5천 원이 쏘아 올린 50만 원의 기적


보통 사람이라면 불고기를 사 먹거나 저축을 했겠지만, 우리 아빠는 달랐습니다. 기분이 최고조에 달한 아빠의 발길이 향한 곳은 엉뚱하게도 시장통 옆 '대우전자 대리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비디오 한 대 들여놓자!"


당시 삼성전자의 보급형 VTR은 30만 원도 안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눈은 이미 그 시절 최고의 축구 스타 '야생마 김주성'이 선전하던 대우 탈렌트Q에 꽂혀 있었습니다.



안정환 이전 미남 축구선수, 야생마 김주성이 선전했던 대우전자 VTR


가격은 무려 약 50만 원 육박! 주운 돈 5천 원을 핑계 삼아 그 100배가 넘는 거금을 일시불로 긁어버리신 아빠의 '기적의 지름 논리' 앞에, 엄마도 그날만큼은 혀를 내두르며 침묵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 집 안방에는 극장 상영관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비디오만 있으면 TV를 슬로우, 뒤로, 앞으로 모두 볼 수 있단 말이야!"


기대했지만 당연히 TV는 재생속도, 거꾸로 재생은 안 되었고 테이프 조차도 화면의 줄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어 실망했습니다.





2. 엄마의 이중잣대: 새우깡 100원 vs 비디오 1,000원


VTR이 들어온 후, 우리 집의 경제 체제는 묘하게 재편되었습니다. 엄마는 평소 100원짜리 새우깡 한 봉지 사달라는 아들의 애원에는 "이 썩는다"며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셨지만, 희한하게 비디오 대여료 1,000원에는 한없이 너그러웠습니다.


동네 비디오 가게의 2박 3일 대여료 1,000원.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그 돈은 단순한 대여료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 틀어주면 한 시간 반 동안 아들 둘이 넋을 잃고 브라운관 앞에 달라붙어 조용해지는, 세상에서 가장 가성비 좋은 '육아 퇴근권'이었던 셈이죠.


덕분에 우리 형제는 엄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매주 전설적인 명작들을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호환과 마마가 뭔지 몰랐어요. 약간 야릇한 장면도 끼어 있죠.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본 방송이 시작되기 전, 호랑이와 천연두 귀신이 나오던 이 전설의 공익 광고 캠페인을 보며 우리는 불법 비디오의 무서움을 배웠습니다.


3. "신프로" 코너의 긴장감과 반납의 예절


비디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풍기던 그 특유의 플라스틱 냄새와 눅눅한 공기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테이프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곳은 단연 '신프로(신작)' 코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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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가게.jpg
온갖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한 신비(?)의 세계


가장 가슴 떨리는 순간은 내가 원하던 비디오 곽이 똑바로 꽂혀 있을 때였습니다. 만약 케이스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면? 그건 이미 누군가의 VTR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절망의 신호였죠. 우리는 그 거꾸로 된 케이스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다가, 포기하지 않고 옆 동네 비디오 가게까지 온종일 순회를 도는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어렵게 테이프를 빌려 오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끝까지 감겨 있는가'였습니다. 전 사용자가 매너 없이 그냥 반납했다면, 우리는 육중한 VTR의 '리와인드(Rewind)' 버튼을 누르고 "위이이잉" 소리가 멈출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 [그때 그 시절 TMI] 비디오 가게의 숨겨진 룰 편


1. "테이프는 끝까지 감아서 반납해 주세요"

비디오 가게의 절대적인 에티켓. 테이프를 감지 않고 반납하면, 다음 손님은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영화의 결말부터 보게 되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비디오 대여 가게에서는 자동차 모양의 테이프 감는 기계가 쉬지 않고 돌고 있었습니다.


비디오 감개.jpg 열일하던 비디오 리와인더


2. 헤드 클리너(Head Cleaner)의 마법

VTR을 많이 보다 보면 화면에 가로줄이 쫙쫙 가고 지지직거리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것이 바로 '헤드 클리너'. 일반 테이프처럼 생겼지만, 구멍에 클리닝 액을 한 방울 톡 떨어뜨리고 1분 정도 돌려주면 기적처럼 화면이 깨끗해졌습니다.


_수정됨_비디오 헤드 클리너.jpg 화질이 깨끗해지는 마법의 도구



3. 미성년자 관람불가, 그 금단의 구역 (빨간딱지)


비디오 가게 구석, 유독 케이스 옆면에 빨간딱지가 붙어있고 성인 눈높이에만 꽂혀 있던 그곳. <애마부인>이나 <뽕> 같은 성인 에로 비디오 코너는 초딩들에게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금단의 구역이었습니다. 아빠 심부름으로 왔다는 핑계를 대며 기웃거리다 주인아저씨에게 등짝을 맞고 쫓겨나는 형들을 보며,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경외심을 키우곤 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안방 장농 안에 깊숙히 숨겨져 있던 금단의 보물(?)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 이미지 및 자료 출처

1. 대우전자 탈렌트V 김주성 광고
https://www.youtube.com/watch?v=cF_GysyLa4w

2. 80년대 비디오 대여점 풍경
https://blog.aladin.co.kr/717962125/3798296
https://m.ruliweb.com/community/board/300260/read/30548905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1483

3. 전설의 호환 마마 불법 비디오 경고 화면 (위키백과 아카이브)
https://www.youtube.com/watch?v=Z8jQ1-deju0

4. 비디오 리와인더
https://m.ruliweb.com/hobby/board/300109/read/11943366

5. VTR 헤드 클리너와 클리닝 액 (VTR 수리 전문 아카이브), 비디오 가게
https://namu.wiki/비디오 헤드 클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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