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원짜리 동전과 뿅뿅거리던 우리들의 해방구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종례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원보와 나는 눈빛을 교환했습니다. 선생님이 조회 시간마다
"방과 후에 불량 학생들 많은 오락실 가지 마라!"
라고 신신당부하셨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이미 시장 어귀에 있는 '현대 오락실'로 향하고 있었죠. 스마트폰도 없고 텔레비전 만화영화도 저녁 6시나 되어야 시작하던 시절, 피 끓는 국민학생들에게 그곳만큼 완벽한 해방구는 없었습니다.
"야, 너 얼마 있냐?"
"나 백 원. 새우깡 사 먹을 거 안 썼지."
둘이 합쳐봐야 동전 두세 개가 전부였지만, 우리는 당당하게 오락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담배 냄새와 화려한 브라운관 불빛, 그리고 귓가를 때리는 8비트 전자음이 우리를 반겼습니다.
"야, 저 형 진짜 잘한다. 왕(보스)까지 가겠는데?"
"어, 내 말이. 저 형은 백 원으로 하루 종일 하네."
주머니 사정이 뻔하니, 사실 우리가 직접 조이스틱을 쥐는 시간보다 동네 고수 형들이 하는 걸 뒤에서 넋 놓고 지켜보는 시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래도 원보와 오락하는 형들 뒤에서 입방아를 찧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죠.
초창기 오락실의 터줏대감이었던 '갤러그'와 '1942',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블록을 돌려대던 '테트리스' 화면 앞은 늘 문전성시였습니다. 특히 귀여운 공룡이 방울을 뿜어내던 '보글보글'이나 눈덩이를 굴리던 '스노우 브라더스'를 구경할 때면, 우리는 브라운관 BGM을 입으로 흥얼거리며 훈수를 두기 바빴습니다.
"야, 저기 바나나 먹어! 빨리 방울 터뜨려야지!"
남의 게임을 내 게임처럼 몰입해서 훈수 두던, 100원짜리 마법의 시간이었습니다.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2인용 액션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명작 '캐딜락'이나 고기를 주워 먹으며 체력을 보충하던 '천지를 먹다 2'를 할 때면 자리싸움부터 치열했죠.
"야, 엉덩이 좀 저쪽으로 밀어봐! 나 바닥으로 떨어진다고!"
의자가 부족하면 좁은 플라스틱 쪼그리 의자 하나에 원보와 엉덩이를 반씩 걸치고 앉아 우리는 처절한 전우애를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력은 늘 보스판 근처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화면에 큼지막하게 'Continue? 9, 8, 7...' 카운트다운이 뜨면 비상이 걸렸습니다.
"원보야, 너 동전 남은 거 없어? 빨리 이어야 돼!"
"없어! 아까 보글보글 내 돈으로 했잖아!"
카운트다운이 '0'이 되고 눈물을 머금고 화면 속 영웅들이 쓰러지는 걸 지켜볼 때의 그 처절한 아쉬움이란! 가끔 운 좋게 동전이 넉넉한 날엔 '세이부 축구'를 했습니다. 웅장한 아나운서의 샤우팅과 함께 불꽃 슛이 네트에 꽂히면, "봤냐? 내 불꽃 슛!" 하며 원보와 손바닥이 부서져라 하이파이브를 치곤 했습니다.
오락실 구석에서는 종종 첩보 영화(?)가 찍히곤 했습니다.
"야, 저 형 또 철사 넣는다. 대박."
원보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엔 돈 없는 불량한 형들이 얇은 철사나 라이터 딱딱이를 동전 투입구에 넣고 튕기는 '철사 신공'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찰칵 소리와 함께 코인이 올라가면 환호했지만, 이내 "이놈 시키들!" 하며 달려온 아저씨의 빗자루에 두들겨 맞고 쫓겨나는 게 다반사였죠.
그리고 90년대 초반, 오락실을 평정한 절대 존엄 '스트리트 파이터 2'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신나게 버튼을 부술 듯 두드리며 "아도겐~ 워류겐~"을 외치고 있을 때, 화면에 갑자기 붉은 글씨로 "Here comes a new challenger!"가 뜨면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야... 반대편에 누구야? 고수 형 아니야?"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우리는 샌드백처럼 맞고 장렬히 깨졌습니다. 가끔은 동네 형들끼리 붙어, 얍삽하게 가드만 올리고 하단 차기만 남발하다가 성질난 형이 시비를 걸기도 했죠.
"야, 너 이리로 나와!"
화면 속 격투가 실제 골목길 '현피'로 이어지는 살벌한 풍경이 벌어지면, 저와 원보는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형들이 하다 만 게임을 냉큼 이어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명절 직후, 세뱃돈 1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고 원보와 오락실에 가는 날은 만수르가 부럽지 않았습니다.
"원보야, 오늘은 내가 쏜다! 맘껏 골라라."
불투명한 플라스틱 판넬 밑 반원 모양 구멍에 지폐를 밀어 넣으며 "아저씨, 동전 바꿔주세요!" 외치면, 무심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100원짜리 10개를 짤랑거리며 쥐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돈도 오락기 앞에서는 순식간에 녹아내렸죠. 판넬 안에 수북히 쌓인 동전이 어찌나 부럽던지요.
가끔 정신없이 오락을 하다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너 이 녀석, 학원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동네 친구 현호 엄마가 들이닥친 겁니다. "아, 엄마... 이 판만 하고!" 버티던 현호는 어김없이 찰진 등짝 스매싱을 맞고 귀를 잡힌 채 끌려 나갔죠.
"야, 고개 숙여. 우리 엄마도 올지 몰라."
원보와 나는 브라운관 앞까지 고개를 처박고 자세를 한껏 낮췄습니다.
가진 동전을 모두 탕진하고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귓가를 찢을 듯 울려 대던 뿅뿅거리는 전자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서늘한 바깥 공기가 훅 밀려왔습니다. 주머니는 가벼워졌고, 왠지 모를 헛헛함이 밀려들었죠. 어스름이 깔리는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눴습니다.
"원보야, 나 간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어, 내일 봐!"
저 멀리서 저녁 먹으라며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던, 참으로 철없고 그립던 100원짜리 저녁 풍경이었습니다.
� [그때 그 시절 TMI] 오락실의 암묵적 룰 편
1. 동전 쌓기 (체인저의 룰):
누군가 게임을 하고 있을 때, 화면 아래 플라스틱 패널 위에 내 100원짜리 동전을 탁! 하고 올려두는 행위. 이는 전 세계 공통의 무언의 암호로 "다음 판은 내 차례다(I got next)"라는 엄숙한 예약 시스템이었습니다.
2. 문방구 앞 20원짜리 미니 오락실:
정식 오락실에 갈 돈이 없거나 무서운 형들이 신경 쓰일 땐 학교 앞 문방구가 최고였습니다. 단돈 20원, 30원이면 문방구 앞에 놓인 쪼끄만 나무 의자에 쭈그려 앉아 한 판을 즐길 수 있었죠. 가끔 주인아저씨가 기판을 갈아 끼워서 게임 종류가 바뀌는 날엔, 동네 꼬마들이 문방구 앞에 구름 떼처럼 몰려들곤 했습니다.
3. 불문율 '얍삽이 금지':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대전 격투 게임에서 구석에 몰아넣고 꼼수(일명 얍삽이, 예를 들면 가일의 대기 군인 모드나 달심의 긴 팔 공격 등)만 연속으로 쓰면 암묵적인 룰을 깬 것으로 간주하여, 옆자리에서 욕설이 날아오거나 체어샷(의자 던지기)을 맞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① 오락실 : https://v.daum.net/v/20160406101359749
② 갤러그 : https://www.ilovepc.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32
③ 보글보글: https://sungmooncho.com/tag/보글보글/
④ 캐딜락 : https://namu.wiki/w/캐딜락
⑤ 천지를 먹다2 : https://www.youtube.com/watch?v=6Q1gB6-U3Es
⑥ 세이부 축구 : https://www.youtube.com/watch?v=8BDYMhqjyRI
⑦ 스트리트파이터2 : https://www.gamet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