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8살, 목욕탕의 추억

수증기 가득하던 곳, 여탕에서 친구와 만나다.

by 최종병기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동네 목욕탕에 가는 날은 때를 벗기는 고통의 날이 아니라 신나게 물장구치는 워터파크 개장일이었습니다. 탈의실의 쾌퀴한 로션 냄새와 탕 안을 가득 채운 뽀얀 수증기 속에는 잊지 못할 짭짤하고 달콤한 추억들이 녹아 있습니다.




1. 온탕의 생존 사투와 비누 거품 테러


엄마 손을 잡고 가던 목욕탕. 2층은 여탕, 3층은 남탕입니다.


다섯, 여섯 살 무렵이었습니다. 겁도 없이 뜨끈한 온탕에 들어갔다가 그만 바닥에 발이 미끄덩! 하는 순간 꼬르륵 물속으로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코로 물이 들어와 허우적대며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고 있으면, 보통은 엄마가 머리채를 잡아 건져주셨지만 어떤 날은 옆에서 때를 불리던 생면부지의 아줌마가 나를 번쩍 건져 올려주시곤 했습니다.


욕조 아니에요. 수조에요. 들어가면 큰일나요.


그 시절 동네 목욕탕에는 지금처럼 칸칸이 서서 씻는 샤워기보다, 허리춤까지 오는 긴 직사각형 수조(욕조)에 물을 받아두고 바가지로 퍼서 쓰는 곳이 많았습니다.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푸다가 실수로 비누라도 수조에 빠뜨리는 날엔 대참사가 벌어지죠. 등짝으로 날아오는 엄마의 매운 스매싱과 함께, 엄마는 주변 아주머니들에게 "아이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바가지로 허겁지겁 거품을 걷어내야 했습니다.




2. 8살, 여탕에서 마주친 그녀


최대한 어깨를 움추려 작게 보이라고 지령을 받고 몇 살이냐고 물으면 7살이라고 대답하라는 엄마의 이야기.


또래보다 마르고 작았던 저는 무려 초등학교 1학년(8살) 초반까지도 당당하게(?) 엄마 손을 잡고 여탕에 출입했습니다. 문제는 그곳에서 가끔 같은 반 여자애를 마주친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유치원 토끼반 우리 선생님도 만나기도 했어요.


그 시절 목욕탕

탈의실에서 딱 마주치면 같은 반, 또는 동네 여자친구는 부끄러워서 엄마 뒤에 숨어 옷을 안 벗으려 버텼고, 제가 먼저 탕에 들어가 있으면 녀석이 수건으로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럽게 들어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색함도 잠시입니다. 5분만 지나면 저는 작은 참새(?)를 흔들며 같이 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세상에서 제일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놀았습니다. 동심이란 참으로 위대합니다.




3. 4시간의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달콤함


엄마와 목욕탕에 가면 가장 큰 미스터리는 '도대체 안에서 뭘 그리 오래 하는가'였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기본이 3~4시간. (나중에 알았지만, 그 시절 어머니들은 탕 구석에서 몰래 수건이나 속옷 빨래까지 하시곤 했죠.)

심심해진 저는 냉탕에서 코를 막고 잠수 놀이를 하거나, 김이 서린 거울에 입김을 불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도 지루해지면 거울에 얼굴을 바짝 대고 '내 눈동자는 어떻게 생겼나' 하며 눈으로 눈을 관찰하는 기괴한 해부학 시간(?)을 갖기도 했죠.


엄마의 부름에 달려가면 머리 감겨주고 이태리 타월로 때를 미는데 그게 너무 따가워 "아얏! 아파~!" 하며 갖은 짜증을 부리면서 요리조리 엄마의 손길을 피했습니다. 당연히 가만히 좀 있으라며 엄마의 등짝 스매싱을 맞기 일쑤였습니다.


요거 한 잔(?)이면 모든 피로가 다 풀리죠.


그렇게 영겁의 시간이 흐른 뒤 탕을 나서는 엄마의 두 볼은 언제나 터질 듯이 벌겋게 익어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들어갈 때는 옷을 벗어도 안 추웠는데, 뜨거운 탕에서 실컷 지지고 나오면 탈의실 공기가 왜 그리도 살을 에는 듯 춥고 오들오들 떨리던지. 하지만 그 모든 고통을 한 방에 씻어주는 마법의 물약이 있었으니, 바로 카운터 냉장고에서 꺼내 먹는 시원하고 달달한 '초코 우유' 하나였습니다!




4. 남탕의 지배자, 때밀이 아저씨와의 조우


2학년이 되자 드디어 여탕 출입 금지령이 떨어졌습니다. 엄마는 저를 남탕에 밀어 넣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때밀이 아저씨'에게 저를 위탁했습니다.

아저씨의 첫 번째 지령은 단호했습니다. "저기 온탕에 목까지 찰랑하게 담그고 때 불려놔라!" 하지만 온탕은 초등학생이 견디기엔 너무나 펄펄 끓는 용암이었습니다. 탕 밖에 앉아 TV를 보며 수시로 저를 감시하는 아저씨의 매의 눈을 피해, 저는 다리만 살짝 담그고 있다가 아저씨가 쳐다보면 슬쩍 목까지 들어가는 눈치 게임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래도 때밀이 아저씨의 풀코스 서비스는 최고였습니다. 때도 빡빡 밀어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헹궈주고, 심지어 나와서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머리까지 말려주셨으니까요.


덜덜덜 거리는마사지기...


모든 세팅을 끝내고 평상에 앉았지만 여탕의 엄마는 나올 기미가 없었습니다. 허리에 걸고 덜덜거리는 마사지 기계(덜덜이)도 해보고, 체중계에도 올라가 보고, 평상에 앉아 담배 피는 아저씨들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와 같은 질문에 대충 답하며 TV를 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쯤... 카운터 아저씨의 천사 같은 목소리가 탈의실에 울려 퍼집니다. "OO아~! 엄마 나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던 그 가벼운 발걸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5. 신문물의 등장, '사우나'의 신세계


고학년이 되던 80년대 말. 아빠를 따라 처음으로 동네 목욕탕이 아닌 번쩍거리는 '사우나'라는 곳에 입성했습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신세계였습니다. 옷장은 번쩍거렸고, 수건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며, 무엇보다 탕 안에 무려 '샴푸, 비누, 린스(!)'가 공용으로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보지 못한 린스라는 것이 목욕탕에 있다니! 게다가 온탕 바닥에서는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물이 바깥으로 조금씩 넘쳐흐르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남들이 남겨놓은 불쾌한 '때'나 부유물들이 둥둥 떠다니지 않고 깔끔하게 밀려 나갔습니다.


'사우나' 라는 것은 비싼 입장료만큼이나 나의 목욕 라이프가 한 단계 수직 상승하던, 경이로운 날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었던 90년대 말 이후 '찜질방' 이라는 것이 새로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 [그때 그 시절 TMI] 목욕탕의 암묵적 룰 편


1. 여탕 출입 나이의 변천사

80년대만 해도 초등학교 1~2학년 남자아이들이 여탕에 들어오는 일이 흔했습니다. "애가 작아서 탕에서 혼자 넘어지면 안 된다"는 핑계가 통하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7세, 5세로 점점 낮아지더니, 현재 공중위생관리법상으로는 '만 4세(48개월) 이상'의 남녀 혼욕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8살의 여탕 출입은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2. 남탕 탈의실의 영원한 친구 '덜덜이'

정식 명칭은 '벨트 마사지기'. 넓은 띠를 허리나 엉덩이에 걸고 스위치를 켜면 온몸의 살이 격렬하게 떨리던 그 기계입니다. 아빠를 기다리던 꼬마들의 훌륭한 놀이기구이자, 배 나온 아저씨들의 필수 코스였죠. 덜덜거리다 보면 뱃살이 다 빠질 것 같은 묘한 플라시보 효과가 있었습니다.


3. 한국인의 쏘울템, '이태리타월'의 비밀

초록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 피부가 시뻘게지도록 때를 벅벅 밀 때 없어서는 안 될 이태리타월! 그런데 왜 100% 한국의 목욕 문화 발명품에 '이태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이태리 사람은 피부가 굉장히 고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1962년 부산에서 김필곤 씨가 처음 고안한 이 수건은, 당시 까칠까칠한 질감을 내기 위해 수입했던 원단(비스코스 레이온)이 '이탈리아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단이 너무 거칠어서 의류에는 쓸수가 없었고, 애써 수입한 원단을 폐기처분할 순 없어 활용 방법을 고민하던 중, 회사 관계자 중 하나가 샤워를 하며 "까칠까칠한 원단으로 피부를 밀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고 회사에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렇게 시범으로 만든 제품의 반응은 성공적이었고, 이걸 그대로 제품으로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름만 이태리일 뿐, 전 세계에서 한국인만 아는 궁극의 시원함을 선사하는 진정한 K-아이템입니다.


※ 이미지 출처

① 목욕탕 수조 : https://m.blog.naver.com/leevisa/221730028463
② 벨트 마사지기 : https://prod.danawa.com/info/?pcode=2452300
③ 이태리 타월 : 나무위키(이태리 타월)
④ 초코우유 : http://seehint.com/product/view.asp?no=3547
⑤ 목욕탕 :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91223/25008862/1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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