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일 좋아'했'던 과일 빠나나

빠나나 아니죠~ 버내너 맞습니다~

by 최종병기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물먹은 솜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내쉬는 숨은 뜨거웠고, 입안은 끈적거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많이 아픈가 봐? 열이 펄펄 끓네."


이마에 닿는 엄마의 손바닥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내 몸은 불덩이였다.


그날부터 나는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몽롱한 시간 속에서, 나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미닫이문 너머 검은 그림자가 쾅쾅 문을 두드리며 "너를 데리러 왔다!"고 소리쳤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엄마 아빠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끔 눈을 뜨면 하얀 천장, 엄마의 걱정스러운 표정과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회복, 그리고 100원의 포상금


며칠 뒤, 눈을 떴을 때는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밖에는 참새가 짹짹거렸고,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우리 뱅기~ 이제 일어났나? 열 다 내렸네!"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말에 괜히 서러워져서 “앙—” 하고 울어버렸다. 저녁 먹고 나서도 시무룩하게 누워 있는데 엄마가 누군가와 전화를 끊고는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어준다.


“요 앞 제일 문방구 가서 오락 하고 와.”


와… 문방구 오락기. 갤러그 한 판 50원. 100원이면 두 판, 6살 인생에 두 판을 “허락받는” 게 아니라 “권유받는” 경험은 처음이다. 100원을 쥐고 집을 나선다.


문방구 문을 밀고 들어가니, 아줌마는 늘 그렇듯 유리 진열대 뒤 평상에 앉아있고, 평일 저녁 8시의 문방구는 텅 비어있다. 아줌마에게 50원 두 개로 바꾸고 오락기 앞에 앉아 동전 하나를 넣는다. 게임을 시작하라고 재촉하는 전자음이 문방구 안을 메아리친다. 평소엔 동전 넣는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었는데, 아줌마와 둘만의 공간에서 갤러그의 뿅뿅 소리가 너무 시끄럽게만 느껴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게임은 공허하다.

image.png 추억의 검은 화면, 갤러그.

평소보다 더 일찍 죽고는 결국 50원 한 판만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은 탓이었다.




검은 봉지 속의 노란 보물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빠!" 퇴근한 아빠 품에 안기자 왠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빠는 낄낄 웃으며 엄마와 눈치를 주고 받더니 등 뒤에 숨겨둔 검은 비닐봉지를 내민다.


"자, 다 나았으니까 선물!"


봉지 안에는 샛노랗고 길쭉한 것, 바로 바나나 한 개가 들어있었다. TV에서나 보던 그 귀한 바나나! 이름도 영어인 걸 보면 부자인 미국 사람들이나 먹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눈물을 뚝 그치고 바나나를 받아들고 깡충깡충 뛰었다.

바나나.jpg


천 원의 행복, 껍질까지 핥아먹다

조심조심 껍질을 벗겼다. 하얀 속살이 드러나자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크게 한 입 베어 물면 너무 빨리 없어질까 봐, 앞니로 야금야금 갉아먹고 사탕처럼 빨아먹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그 맛은 정말 '꿀맛'이다.


"바나나만 먹고 살고 싶다..."


어느새 내 손에는 빈 껍질만 들려 있었다. 너무 아쉬워서 껍질 안쪽에 붙은 하얀 부분까지 혀로 싹싹 핥아먹었다. 엄마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맛있어?"

"응! 완전 맛있어! 아빠, 이거 얼마야?"

"어, 한 개 천 원."


1,000원. 새우깡이 100원이니까, 새우깡 10봉지를 한 번에 먹어치운 셈이다. 배는 하나도 안 부른데...




그날 밤, 엄마 아빠 사이에 누워 포근한 냄새, 다정한 손길, 엄마 가슴에 얼굴을 묻고 들리는 숨소리, 아직도 입안에 감도는 달콤한 바나나 향기와 함께 잠이 들었다. 저 멀리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 맛있는 바나나를 매일 먹겠지. 거기가 천국이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가 되어 바나나의 달콤한 꿈을 꾸었다.




그때 그 시절 TMI : 바나나의 추억


1. 금(金)나나 시절

80년대 바나나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바나나 1송이(약 2kg) 가격이 쌀 반 가마니 가격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하니(물론 80년대 초반 이야기지만), 낱개로 파는 바나나 한 개가 1,000원~2,000원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거나 큰 병을 앓고 나야만 맛볼 수 있는 귀한 과일이었죠.


image.png 84년 기사, 오렌지가 5~7백원인데 바나나는 7천원...

84년에 짜장면이 500원 하던 시절 바나나 한송이(약 2kg)가 대강 1.5만원이라면, 당시 기준 짜장면 30그릇 가격이니 지금 기준으로 대략 20만원 정도인가요?


2. 수입 자유화와 가격 폭락

1991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로 바나나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가격이 똥값(?)이 되었습니다. 흔해지면서 예전의 그 귀한 대접은 못 받게 되었지만, 덕분에 우리는 바나나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나나는 지금 바나나랑 다른 과일인 것 같아요. 제가 좋아했던 그 맛과 아무래도 맛이 다른 것 같은데...


3. 바나나 맛 우유의 탄생

바나나가 너무 비싸서 서민들은 맛보기 힘들자, 빙그레에서 1974년에 바나나 향을 넣어 만든 것이 바로 '바나나 맛 우유'입니다. 바나나 우유가 아니고 바나나'맛' 우유입니다. 올해 무려 50살이 넘었고 여전히 연간 1억병이 팔립니다. 진짜 바나나는 안 들어갔지만 70~80년대 바나나맛 우유로 대강의 바나나의 맛을 짐작하며 대리 만족을 할 수 있었던 국민 음료죠.

image.png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