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한 왁스 냄새의 풍경

무릎으로 닦는 건지, 걸레로 닦는 건지.

by 최종병기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종례 시간, 담임선생님이 비장한 표정으로 교탁 앞에 서셨다.


"자, 다음 주에 학교에서 '환경미화 심사' 있는 거 알지? 우리 반이 꼭 1등 해야 한다.

그러려면 오늘은 바닥에서 광이 나도록 닦아야 해. 알겠나?"


선생님은 교탁을 탁 치며 물으셨다.


"오늘 청소 당번, 어느 분단이야?"


짝궁과 묘한 눈빛을 교환하던 그 순간, 1분단에 앉은 녀석이 손을 번쩍 들더니 얄밉게 소리쳤다.


"선생님! 2분단입니다!"


우리 2분단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즈막한 탄식과 한숨이 교실을 떠돌았다.

선생님은 나를 보며,


"오늘 2분단 대충 대충 하지 말고 청소 제대로 하고, 반장은 청소 끝나면 나한테 검사 받으러 와야 한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른 분단 녀석들은 "와! 집에 가자!" 하면서 가방을 싸 들고 튀어나가는데, 그 뒷모습에 대고 소리 없는 주먹질을 날렸다.




실내화 주머니 속의 100원짜리 장비


나는 책상 옆에 걸린 '별나라 손오공' 실내화 주머니를 주섬주섬 챙겼다. 찍찍이 앞주머니를 찌익 열면 나의 청소 장비가 들어있다. 학기 초 선생님의 숙제로 아침 등굣길에 '제일 문방구'에서 각각 100원 주고 산 곰표 왁스랑 손을 넣어 닦을 수 있는 초록색 손걸레다. 걸레는 반질반질하고 특유의 왁스 냄새가 난다.


비누형, 구두약형, 액체형 왁스, 구두약 왁스가 광은 제일 잘 나지만 청소에 편한 건 액체형


청소 1단계: 우당탕탕! 먼지야 덤벼라!


"야! 책상 다 뒤로 밀어!"

"우당탕탕! 쿵! 쾅!"


책상 미는 소리가 마치 전쟁터 대포 소리 같다. 선생님은 시끄럽고 먼지 난다고 진작 교무실로 피신하셨다. 이때다 싶어 남자애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다.


책상이 뒤로 다 밀어내니 교실은 휑한 바닥을 드러낸다. 이제 먼지들을 밀어낸 책상 쪽으로 쓸어야 한다. 내 뒷자리에 앉는 원보 녀석은 빗자루를 무슨 창처럼 휘두르며 "이야아압! 받아라!" 하고 장난을 쳤다. 옆에 있던 철수도 질세라 빗자루로 바닥을 팡팡 내리치고 먼지를 날리는 것인지 쓸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이 펜싱 대결을 펼친다. 순식간에 교실 바닥에 깔려있던 하얀 먼지가 폭탄 터진 것처럼 피어올라 교실이 뿌옇게 변했다.


"콜록! 콜록! 야! 먼지 다 나한테 오잖아!"


내가 소리치자 원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마시는 시늉을 했다.


"으하하! 내가 이 먼지 다 마셔주마! 흡하! 흡하! 몸에 좋은 먼지다!"


오른쪽 이미지의 책걸상으로 조금씩 교체되었습니다. 책상 반을 나눠 넘어오는 건 빼앗았죠. 여자 짝궁은 울기도 했어요.


우리는 그게 뭐가 그리 웃긴지, 친구들과 뿌연 먼지 구덩이 속에서 서로 낄낄대며 빗자루로 먼지를 책상 밑으로 쓱쓱 몰아넣었다.


2단계: 가시 조심! 살금살금 왁스질


먼지를 다 몰아내고 이제 왁스 칠 시간. 우리는 마루 바닥에 일렬로 엎드렸다. 무턱대고 걸레질을 하면 안 된다. 교실 나무 바닥은 낡아서 곳곳에 가시가 일어나 있다. 지난번에 급하게 걸레질하다가 손바닥에 가시가 푹 박혀서 양호실 가서 뺀 적이 있다. 진짜 눈물 찔끔나게 아팠다.

걸레로 닦는 건지 무릎으로 닦는 건지 알 수 없...


그래서 우리는 빠르게 걸레질을 하며 광을 내지만 손은 조심조심 움직였다. 나무 결을 따라서 살살, 하지만 꼼꼼하게. 왁스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반질반질해지는 바닥을 보면 기분은 좋았다.


3단계: 오와 열! 그리고 칠판 경고장


교실 앞쪽 바닥을 다 닦은 후에는 다시 책상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먼지들을 책상 밑으로 계속 쓸어낸다.

누가 잃어 버렸을지 모를 지우개 조각들과 몽당 연필도 보인다. 휑한 교실 뒷편에서 먼지를 쓰레받기로 쓸어 내고 다시 걸레질을 한다.


청소의 마무리는 책상 정렬이다. 선생님은 줄 삐뚤어지는 걸 제일 싫어하신다.


"야, 거기 3번째 줄! 더 오른쪽으로! 앞뒤 간격 맞춰!"


우리에겐 비법이 있다. 바로 나무 바닥의 세로 줄이다. 짙은 갈색 나무 틈새 선에 책상 다리를 딱 맞추면 기가 막히게 오와 열이 맞는다.


그 와중에 원보 녀석, 또 입만 살아서 떠들고 있다. 반장인 나는 칠판에 크게 썼다.


떠든 사람: 심원보


옆에 있던 동진이가 쿡 찌르자 그제야 칠판을 본 원보가 놀라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하는 짓이 귀여워서 선생님 오시기 직전에 쓱 지워줬다. 오늘 새우깡 하나 사줘라.

많이 쓰면 친구들이 안 좋아해요.


부리나케 교무실로 간 나는 선생님께 청소 다 했음을 알리고 신나게 복도를 달려 시끌시끌한 교실 문을 벌컥 열자 선생님이 오셨다고 생각했는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친구들은 내 얼굴을 보자 안도하며 하면서 다시 떠들기 시작한다.


"선생님 오신다!!!"


교무실에서 오신 선생님이 번쩍거리는 바닥과 칼같이 줄 맞춰진 책상을 보고 흐뭇해하셨다.


"그래, 2분단 수고했다. 환경미화 1등 하겠다. 가 봐."


"와아!!!"


우리는 가방을 둘러메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창밖을 보니 벌써 운동장은 아이들로 시끌벅적했다. 먼저 나온 다른 분단 남자 아이들이 운동장을 누비며 소리치고 있었다.


"야! 여기로 패스해! 패스!"

"야! 너희들도 같이 축구하자!"


친구들이 우리를 보고 손짓했다.


"야! 축구하러 가자!"


운동장 축구.png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daum1313/


우리는 실내화 주머니를 쥐불놀이하듯 돌리며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손끝에서는 비릿한 왁스 냄새가 났지만, 운동장의 흙냄새와 섞이니 그마저도 향긋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 교실의 공기와 풍경과 냄새가 난다.

청소 시간은 단순히 교실을 깨끗하게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같이 무릎을 꿇고, 같이 땀 흘리고, 같이 투덜대고,같이 웃던
우리들의 작은 추억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시절 TMI : 국민학교 마루바닥의 비밀


1. "왁스 주세요"의 추억

당시 청소 준비물의 필수품이었던 고체 왁스. 주로 노란색 깡통의 '오성 왁스'나 빨간색 깡통의 '곰표 왁스'를 많이 썼습니다. 뚜껑이 잘 안 열려서 동전이나 자로 억지로 따다가 손톱이 뒤집어지는 사고(?)도 많았죠. 뚜껑을 열면 확 풍기던 그 독한 석유 냄새는 덤이었습니다. (액체 왁스 찍찍 뿌리는 재미가 있습니다.)


알고보니 건강에 좋지 않았다.

2. 환경미화 심사는 선생님들의 자존심 대결?

새 학기나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환경미화 심사'. 교실 뒤편 게시판 꾸미기부터 유리창 닦기, 바닥 광내기까지 아이들을 총동원했습니다. 사실 이건 아이들보다 담임 선생님들의 보이지 않는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죠. 관심이 없는 선생님도 있지만 인테리어(?)에 소질이 있는 선생님 반은 아이들과 함께 노력하여 정말 화려하고 화사하게 꾸며지기도 했습니다. 우수 학급 팻말이 걸리면 선생님 어깨가 으쓱해지셔서 그날 숙제를 면제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3. 나무 바닥 가시의 공포

90년대 중반까지 학교 교실 바닥은 대부분 나무(플로어링)였습니다. 니스 칠이 벗겨지면 나무 결이 일어나 가시가 되기 일쑤였죠. 그래서 왁스 칠은 단순히 광을 내는 게 아니라, 나무가 썩거나 갈라지는 걸 막기 위한 필수 작업이었습니다. 바닥 틈새에 낀 때를 벗겨내려고 칼이나 자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4. 역사 속으로 사라진 풍경

1996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학교 현대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나무 바닥은 차가운 돌바닥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무릎 꿇고 엎드려 왁스 칠을 하는 대신, 밀대 걸레로 쓱쓱 닦습니다. 편해지긴 했지만, 친구들과 나란히 엎드려 엉덩이를 들썩이며 경쟁하듯 걸레질하던 그 정겨운 풍경은 이제 사진과 기억 속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네요.


이미지 출처
① 실내화 주머니 : https://bunjang.co.kr/
② 왁스걸레 : https://blog.naver.com/space646/221553021510
③ 옛날 책걸상 : http://www.oldgift.com/, https://www.youtube.com/watch?v=WhLAztAJW4c
④ 청소 풍경 : https://cafe.daum.net/baeksan1/MR9o/25, https://www.eja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731
⑤ 떠든 아이 : 영화 '불복종 교사' 포스터 중 일부
⑥ 운동장 축구 사진 : https://blog.naver.com/daum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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