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사랑은 계획대로 찾아오지 않지만요.
흥행을 했더라도, 또는 비록 흥행하지 않았더라도
작품성을 인정 받은 영화라도, 또는 그냥 저냥 식상한 영화라도
과거 OTT 영화 담당자로서 지난 영화를 돌아보며 가볍게 읽을만한 글로 소통합니다.
◎ 감독: 성시흡
◎ 주연: 정재영(한정석 역), 한지민(유소정 역)
◎ 개봉일 / 박스오피스: 2014년 1월 9일 / 63만
◎ 스트리밍: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티빙
◎ 한 줄 평: 엑셀로 인생을 배운 남자가 셀 바깥의 야생 고양이를 만났을 때.
2026년 새해가 밝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이 끝나간다. 올해로 앞자리가 바뀌었거나, 혹은 나이 먹는 게 억울해 만 나이 계산법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여러분. 안녕하신가요?
헬스장은 3일 만에 다시 고요해졌고, 야심 차게 구매한 다이어리는 1월 4일 이후로 백지상태다. 옛 선현들의 '작심삼일'이라는 가르침이 이토록 과학적일 줄이야. 하늘을 우러러 탄식만 나오는 시점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새해 계획이 이미 '초토화'된 여러분을 위한 심폐소생술 같은 영화, <플랜맨>이다.
영화 소개에 앞서, 나 '최종병기'가 이 영화를 얼마나 감명 깊게 보고 실천하려 했는지 고백해야겠다. 영화 속 주인공 한정석(정재영 분)은 1분 1초를 나노 단위로 계획해서 사는 남자다. 나 역시 그를 본받아 '철저하게 계획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했었다.
어느 날 아침,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눈을 떴다.
"젠장, 또 불을 켜고 잤군. ...후훗, 계획대로야."
시계를 보니 8시 30분. 회사는 9시까지다. 내가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닌 이상 지각은 확정이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왜? 플랜맨에게 당황이란 없으니까.
"정확해! 오늘도 계획대로 정확하게 30분을 지각하겠군."
거울을 보니 머리는 추상미술 그 자체, 혼돈의 카오스다. 이틀에 한 번 감는 게 머릿결에 좋다는(출처 불명) 기사를 떠올리며 쿨하게 패스한다. 스티브 잡스가 매일 같은 옷을 입었듯, 나 역시 '어제 입고 의자에 걸어둔 옷'을 입는다.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효율이다.
지하철역으로 뛰어가며 마주치는 헐레벌떡 직장인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당신도 지각이군요.' 동병상련의 정이 느껴진다. 회사에 도착하니 사수가 도깨비 같은 얼굴로 서 계신다.
"자네 같은 놈이 어떻게 입사했는지 미스터리야. 아주 대단해."
"칭찬 감사합니다. 이렇게만 지각하면 되는 건가요?"
...라고 대답했다간 내 인생 계획이 여기서 '강제 종료(Log out)' 될 것 같아 꾹 참았다. 혼나는 것 또한 나의 루틴이다. 직장 상사의 샤우팅을 모닝 알람 삼아 하루를 시작하는 것, 이 얼마나 규칙적인가.
하지만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어제 먹은 매운 닭갈비가 뱃속에서 '계획에 없던'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영화 속 플랜맨은 기상 시간, 횡단보도 건너는 시간, 편의점 가는 시간까지 알람을 맞춘다. 하지만 나의 장 트러블은 알람을 맞춰주지 않는다. 화장실로 질주했으나 이미 옆 칸에서는 처절한 전투(BGM: 굉음)가 벌어지고 있었다.
옆 칸 전우의 처절한 사투 소리에 나도 모르게 "큭" 하고 웃음이 터졌다. 아, 웃는 건 계획에 없던 건데. 결국 나의 야심 찼던 '플랜맨 프로젝트'는 화장실 2사로 옆 칸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계획이 틀어졌고, 철학이 흔들렸고, 장이 배신했다. 그 좁은 화장실 칸에서 나는 깨달았다. 인생은 엑셀(Excel)처럼 셀 단위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 단위도, 초 단위도 아니라는 것을. 그래, 그냥 생긴 대로 살자.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 정석은 나 같은 '무계획형 인간'과 정반대인, 모든 것에 알람을 맞추는 강박증 남자다. 그는 더러운 것을 못 참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혐오한다. 그런 그의 인생에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가 침투한다. 바로 질서라고는 1도 없는, 고양이 털 날리는 밴드 보컬 유소정(한지민)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 영화는 한지민을 위한, 한지민에 의한 영화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한 씨' 미녀들이 있다. 한예슬, 한가인, 한효주, 한채영 등 하지만 내 마음속 최고는 단연 한지민이다. 그동안의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머리를 부스스하게 헝클어뜨린 채 락 스피릿을 뿜어내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 (심지어 노래도 앙칼지게 잘한다! 그녀가 술 마시고 주사를 부리는 장면은 '주사'가 아니라 '예술'이다.)
정재영 배우의 연기력은 또 어떤가. 찌질한데 묘하게 응원하고 싶은 그 특유의 코믹 연기는 <플랜맨>에서도 빛을 발한다. 로봇처럼 딱딱하던 그가 사랑을 느끼고 당황하며 고장 나버리는 모습은, 계획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우리는 매번 계획을 세우고, 매번 실패한다. 영화 속 정재영은 계획이 틀어지면 패닉에 빠지지만, 결국 그 계획 없는 틈바구니 속에서 진짜 소중한 것들을 발견한다. 완벽한 계획보다 중요한 건,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웃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1월의 계획이 이미 망가졌다고 자책하지 말자. 어차피 인생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장 트러블처럼 예측 불가능한 법이니까.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 틈새로 엉뚱한 행복이(혹은 한지민 같은 인연이) 찾아올지 누가 아는가?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 더 재밌는 겁니다. (아마도요?)"
� 어떤 영화인가요?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 더 정확히 말하면 '결벽증 남자의 무계획 로맨스 도전기'. 초반에는 정재영의 병적인 계획성으로 배꼽을 잡게 만들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사실은 사연이 있었어"라며 눈물샘을 자극하는 한국형 코미디의 정석(혹은 강박)을 충실히 따릅니다. 뻔하지만 알면서도 먹게 되는, 익숙한 맛의 김치찌개 같은 영화입니다.
✅ 이런 분들에게 강력 추천 (O)
◎ "한지민이 복지다": 청순함을 버리고 펑크 밴드 보컬로 변신한 한지민의 색다른 매력을 나노 단위로 캡처하고 싶은 분.
◎ "연기 맛집 탐방러": 뻔한 캐릭터도 입체적으로 살려내는 정재영의 생활 연기를 보며 즐겁게 시간을 순삭(Time Killing)하고 싶은 분.
◎ "한국형 로코 애호가": 웃기다가 울리는 그 익숙한 패턴에 거부감이 없고, 가볍게 즐길 팝콘 무비가 필요한 분.
⛔ 이런 분들은 패스하세요 (X)
◎ "클리셰 알레르기 보유자": "웃기다가 갑자기 왜 울려?" 한국 영화 특유의 신파 코드나 뻔한 공식에 몸서리치는 분.
◎ "철학자형 관객": 영화에서 우주의 진리나 심오한 메시지를 찾고 싶은 분. (이 영화는 머리 말고 가슴으로, 아니 그냥 눈으로 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