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면 아련하게 들려오는 순백의 안부 인사
흥행을 했더라도, 또는 비록 흥행하지 않았더라도
작품성을 인정 받은 영화라도, 또는 그냥 저냥 식상한 영화라도
과거 OTT 영화 담당자로서 지난 영화를 돌아보며 가볍게 읽을만한 글로 소통합니다.
겨울이면 불현듯 떠오르는, 잊혀지지 않는 멜로
◎ 감독: 이와이 슌지
◎ 주연: 나카야마 미호(1인 2역), 토요카와 에츠시, 사카이 미키, 카시와바라 타카시
◎ 개봉일/박스 오피스: 1999년 11월 20일 / 140만 명 (국내 일본 실사 영화 최초 100만 돌파)
◎ 스트리밍: 왓챠, 웨이브, 넷플릭스
◎ 한 줄 평: 도서관의 낡은 종이 냄새로 기억되는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이츠키 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당신이 살고 있는 오타루의 설원만큼은 아니겠지만, 여기 서울도 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겨울 특유의 쨍한 냄새를 좋아합니다. 문득 당신의 안부가 궁금해져 펜을 들고 러브레터를 보냅니다.
사실 이 편지를 쓰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빌려 우리에게 영원한 겨울을 선물한 그 배우(나카야마 미호)도, 이제는 당신과 같은 계절 어딘가에 머물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당신에게 부치는 이 편지가 조금 더 조심스럽고 애틋해집니다.
"오겡끼데스까"라는 말의 무게
당신은 알까요? 당신과 닮은 히로코가 하얀 설원 위에서 외쳤던 그 안부 인사는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이자, 남겨진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었습니다. "나는 잘 지내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사람을 온전히 보내줄 수 있을테죠.
お元気げんきですか、私あたしは元気げんきです!(오겡키데스카, 아타시와 겡키데스!)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당신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나요?
편지를 쓰다 보니, 당신이 도서관에서 일하며 찾았던 그 낡은 도서 카드들이 생각납니다. 죽은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남긴 흔적들 말이죠. 당신은 그가 쓴 이름이 본인의 이름인 줄 알았지만, 사실 그건 당신의 이름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창가에서 하얀 커튼이 유령처럼 춤추던 그 순간, 그가 보고 있던 건 책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었겠지요.
우리는 관심 없는 사람의 사소한 습관까지 기억하진 않습니다. 당신은 그가 어떤 시험지를 바꿔치기했는지, 자전거를 타고 어떤 표정으로 기다렸는지, 도서관의 햇살이 어땠는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더군요.
서투르고 순수했던 '첫'사랑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사랑의 '마지막'에 닿아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애뜻함과 아련함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는 왜 항상 사랑을 '과거형'으로만 깨닫는 걸까요.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시간이 지나 먼지를 털어내고 보니 그게 내 생애 가장 빛나는 사랑이었다는 걸, 꼭 버스가 떠난 뒤에야 알게 됩니다.
도서 카드 뒷면의 그림
영화의 마지막, 후배들이 찾아준 도서 카드 뒷면을 보고 당신이 짓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수줍게 웃는 듯, 울음을 참는 듯한 그 표정. 그 남자가 남긴 건, 당신의 모습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받았던 시간'에 대한 증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고 비로소 눈물 흘리는 당신의 모습은, '나도 너를 좋아했었어'라는 뒤늦은 고백처럼 보입니다.
저도 오늘 책장 구석에 박혀있는 낡은 다이어리와 사진첩을 꺼내보려 합니다. 바쁘게 사느라 덮어두었던 제 인생의 옛 페이지에도 미처 화답하지 못한, 누군가 몰래 접어놓은 작은 쪽지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추신.
이츠키 님, 감기는 좀 나으셨나요? 여전히 춥고 시끄러운 세상이지만,
그래도 당신의 안부 인사 덕분에 저도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잘 지냅니다. 당신도 부디, 잘 지내기를."
� 어떤 영화인가요?
첫사랑 영화의 바이블이자,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상 화보집.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여자 '와타나베 히로코'와, 죽은 그와 이름이 똑같은 여자 '후지이 이츠키'. 잘못 배달된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된 두 여자의 여정은, 멜로 영화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상실을 어떻게 치유하는가"에 대한 깊은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특히 OST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이 돋보이는 테마곡 'A Winter Story'. 이 곡이 유독 순수하고 아련하게 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사랑의 순수함이 묻어나게끔 당시 8살이었던 어린 소녀에게 피아노 연주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성인 연주자의 기교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또박또박하지만 어딘가 서툴고 불안한 그 터치감이 '첫사랑'의 감정과 닮아 있습니다.
✅ 이런 분들에게 강력 추천 (O)
◎ "겨울엔 역시 감성이지":
홋카이도의 설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상미와, 듣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OST(A Winter Story)에 빠지고 싶은 분.
◎ "첫사랑 조작단":
없던 첫사랑도 만들어낸다는 마법 같은 영화. 풋풋했던 학창 시절의 기억을(미화해서) 떠올리고 싶은 분.
◎ "나카야마 미호의 리즈 시절":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그녀의 미모와 연기력을 감상하고 싶은 분.
⛔ 이런 분들은 패스하세요 (X)
◎ "답답한 건 딱 질색":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을 해!"라며 주인공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고구마 100개 먹은 답답함을 느끼는 성격 급한 분.
◎ "현실주의자":
"죽은 사람한테 편지를 왜 써? 그리고 그게 왜 배달이 돼?"라며 설정의 개연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영화에 몰입하기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