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D-1 국민학생 생존 보고서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개학이 3일 남았다.
책상 위에 놓인 탐구생활과 빈 일기장이 나를 째려본다. "해야 하는데..." 생각은 든다. 근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집에 전화 울린다. 친구 원보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거기 병기네 집이죠?" 숙제 생각이 1초 스쳤지만, 에라 모르겠다.
나가서 해 질 녘까지 신나게 놀고 들어왔다. 손발이 꽁꽁 언 채 집에 와 아랫목에 손 넣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소중한 하루가 지나간다.
토요일이다!
평일엔 저녁 5시 반이나 되어야 나오는 TV가, 토요일은 낮 12시부터 나온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지난 주 못 본 유머일번지 재방송도 할 것이다. 점심 먹고 TV 앞에 누웠다. <배추도사 무도사>도 보고, 쇼 프로그램도 보고... 방학 숙제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지만 10분만, 10분만 하다가 결국 저녁이 된다.
저녁엔 퇴근한 아빠랑 귤 까먹으면서 <유머 일번지>를 봤다.
"실례실례합니다~♪ 실례실례하세요~♩"
'부채도사'를 보며 배꼽 잡고 웃는데 어느덧 유머일번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아쉬움에 음악, 각본, 마지막 연출자 이름까지 본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하다. 아빠가 갑자기 묻는다.
"방학숙제 다 했냐?"
"아... 저...정리만 하면 돼." (거짓말이다. 시작도 안 했다.) 일요일 하루면 충분하겠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일이 개학이다. 이제 도망칠 곳이 없다. 아침밥을 마시자마자 책상에 앉았다. 지금부터 나는 인간이 아니다. 기계다.
1. 일기장: 3단 변신의 늪
가장 큰 난관, 40일 치 일기장. 일기장을 펼치니 방학 시작한 첫 주의 이틀만 대충 휘갈겨 있다. 음... 38일이 남았군. 매일 같이 쓰는 건 좀 그러니까 대강 30일 정도만 쓴다고 치고...
"한 문장에 1분, 30일이면 90분... 1시간 반이면 끝나네?"
계산이야 완벽했다. 문제는 '창의력'이었다. 40일 동안 논 거 말고는 한 게 없는데 내용을 어떻게 바꿔? 그래도 성의는 보여야 하니까 3단 변신을 시도한다.
1월 5일: "친구들과 축구를 했다. 추웠지만 재미있었다."
1월 6일: "친구들과 다방구를 했다. 재미있었지만 추웠다."
1월 7일: "친구들과 얼음땡을 했다. 우리가 이겨서(?) 신났다. 근데 너무 추웠다."
나름 머리를 써서 '추웠다'와 '재미있었다'의 순서를 바꿔가며 썼다. 근데 일주일 치를 쓰고 나니 밑천이 드러났다. 날씨 기억도 안 난다. 엄마한테 물어봤다가 "시끄러!" 소리만 들었다. 결국 1월 15일쯤에서 연필을 던진다.
"에이 씨, 몰라! 배째! 친구도 안 했을 거야."
2. 수집 숙제: 200원과 쓰레기장
우표 수집, 외국 동전 모으기? 그러고 싶었지만 내 주머니엔 외국 동전은커녕 10원짜리 하나 없다.
엄마한테 "준비물 사야 돼"라고 뻥쳐서 200원을 받아냈다. 슈퍼에서 껌 두 통을 샀다. 쥬시후레쉬, 스피아민트. 일단 껌종이를 벗기고 껌 종이 두 장을 공책에 풀로 붙였더니 14장으로 두 페이지...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1층 쓰레기장으로 나갔다. 남들이 씹다 버린 껌 종이를 주웠다. 은박지와 함께 꼬깃꼬깃한 말린 껌을 손톱으로 싹싹 펴본다. 스무 장쯤 모아 붙이니 대강 4~5장이 나온다. 양은 그럴듯하다. 오케이, 통과.
3. 미술 숙제: 자가 표절의 굴레
그림 그리기 귀찮아서 작년에 그렸던 스케치북을 뒤적거려 본다. 방학 숙제로 낼만한 상상화 그림 한 장을 본다.
'작년에 그린 걸 선생님이 모르겠지. 이걸 뜯어서 낼까?'
자세히 보니 그림이 엉망이다. 1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 더 똥손이었구나. 1년 동안 어쩐지 성장한 것 같아서 뿌듯하다. 완전히 새로 그리긴 귀찮아서 그 그림을 옆에 놓고 똑같이 베껴 그려보기로 한다. 엄마가 사준 '둘리 크레파스'를 꺼냈다. 형형색색 별(★)을 마구 찍고, 우주복 입은 사람 대충 허수아비처럼 그리고, 우주선 하나 그렸다. 나머지는 검은색으로 벅벅 칠했다. 팔 아프다. 검정색 크레파스 부러지고 난리난다.
멀리서 보니 꽤 그럴듯하다. 멀리서 보면.
4. 탐구생활: 두께 조작단
오늘의 메인 이벤트. 문방구에 탐구생활 답안지를 판다고 했지만 베끼는 것도 일이다.
'달의 모양 변화를 관찰해 봅시다.'
베란다 문을 열어보니 구름이 잔뜩 껴서 달도 안 보인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쓴다. "잘 관찰함."
'겨울철새의 이동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생각해봤음." 이라고 썼다가 뭔가 답을 길게 써야 할 것 같다. 책 여백이 너무 좁다. 안 쓰는 수첩 종이를 북 찢었다. 거기다 아무말 대잔치를 써서 딱풀로 덕지덕지 붙였다. "철새는... 추워서 남쪽으로 간다. 나도 추운 게 싫다."
산수 문제도 몇 개 수첩 종이에 풀어서 덧붙였다. 책 밖으로 삐져나온 종이를 안으로 곱게 접었더니, 얄팍했던 탐구생활이 제법 두툼해졌다. 옆에서 보니 뭔가 되게 열심히 공부해서 너덜너덜해진 책 같다. 이것 저것 붙였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5. 독후감
원고지 3장을 채워야 한다. 책 읽을 시간은 없다. 작년에 썼던 독후감을 살펴보다가 책장에 있는 이미 읽었던 책 중 얇은 책들을 매의 눈으로 훑는다. <계몽사 위인전기>. 이순신, 에디슨, 헬렌 켈러, 링컨...
<어머니와 함께 보는 해설> 페이지를 폈다.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다. 그대로 베끼려니 문장이 너무 어른스럽다. "숭고한 희생정신", "애국애족의 길"... 이런 건 국딩 말투가 아니다. 적당히 내 말투로 고치려다 보니 문장이 꼬인다. 지우개로 벅벅 지우다 원고지가 찢어졌다. "참 재미있었다", "감동적이었다.",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급하게 마무리했다. 너덜너덜한 원고지가 내 마음 같다.
우유 팩으로 저금통 만들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밤 11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엄마가 들어와서 등짝을 때리며 소리친다.
(팔짱 낀 채) "이제 와서 울면 뭐 하냐? 그냥 자! 내일 선생님한테 두들겨 맞겠지!"
엄마가 불을 끄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야속하다.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불을 다시 켰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잠깐만 쉬었다가 해야지. 하며 책상에 엎드렸다. 스르르 잠이 들면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내일 학교에 불나게 해주세요...'
꿈속에서 학교에 불이 났다. 뉴스에서 앵커가 말했다.
"관산국민학교가 불이 나서 겨울방학 한 달 연장합니다."
나는 만세를 부르며 신나게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행복했다.
아침에 눈을 떴다. 책상은 어지럽다. 엄마한테 묻는다.
"엄마, 학교 불 나지 않았어?"
불행히도 뉴스 속보는 조용했다. 학교는 멀쩡했다. 가방에 이것 저것 숙제랍시고 한 것들을 챙겨 넣는다. 오랜만에 보는 책가방이 낯설다. 껌 냄새나는 공책, 검은색 대강 칠하다 만 똘똘 말은 그림, 종이 쪼가리를 붙여 조금 뚱뚱해진 탐구생활...
꾸역 꾸역 쑤셔 넣고 책상 정리를 하는데, 누런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나의 겨울방학 생활 계획표>
방학식 전날, 컴퍼스로 완벽하게 그렸던 그 동그라미. '아침 7시 기상, 8시 독서, 9시 EBS 시청...' 방학 내내 가방 속에서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나의 유토피아가 거기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종이를 쳐다보다가 책상 위에 올려두고 방을 나온다. 가져가 봤자 거짓말쟁이라고 혼만 날 테니까. 찬 바람 부는 등굣길, 어젯밤 꿈속에서 본 '불타는 학교'가 아른거린다. 아, 봄방학이 언제라고 했더라.
1. 탐구생활 두께 조작설:
탐구생활의 '생각해 보기' 칸은 좁았습니다. 우리는 꼭 별지(수첩 종이)를 오려 붙여서 답을 적었죠. 내용을 많이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이를 덧붙여 책을 두툼하게 만들어 '열심히 한 척' 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었습니다.
2. 원고지 채우기 신공:
독후감 숙제의 국룰은 '말 늘리기'였습니다. "재미있었다"라고 쓰면 될 것을 "정말로 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또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라고 써서 원고지 두 줄을 채우는 기술! 다들 해보셨죠?
3. 131의 배신: 전화기로 날씨를 묻던 131 ARS. 하지만 "오늘의 날씨"만 알려줄 뿐, 밀린 일기를 쓰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난 날씨"는 절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4. 미술 숙제 꼼수:
그림 그리기 귀찮을 땐 무조건 '우주'나 '바닷속'을 그렸습니다. 검은색이나 파란색 크레파스로 배경을 다 덮어버리면 도화지가 금방 찼거든요.
※ 참고 : 42년째 우주세계만 그리는 과학의 달 행사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18927
※ 이미지 출처
① 탐구 생활 :
나무위키, https://www.mt.co.kr/society/2018/08/12/2018080915573198464
② 원고지 :
https://blog.naver.com/ymsrn777/220380258679
③ 상상화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18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