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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순이 Oct 13. 2023

이러다 차이겠네

선택적 함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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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를 엄마에게 소개해줬다. 혹은 엄마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줬다. 내 입장에서 이 둘을 만나게 하는 것, 이 행동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당연하게도 결혼까지 염두에 둔 사람의 행동으로 해석되는 것인가 보다. 물론 나도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싶고, 그러려면 불편하지만 남자친구를 엄마와 만나게 하는 건 거쳐야 할 순서라고 생각했다.


엄마에게는 그냥 남자친구가 생겼으니 셋이서 같이 밥 한 끼 하자는 이야기 정도만 꺼냈는데 엄마는 이미 혼주석에 서있는 눈치다. '엄마의 기준' 에서 성격도 안 좋고 직업도 별 볼 일 없고 나이도 많아서 결혼을 할 수는 있을까 걱정되던 독신의 딸이 35년 평생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소개해준다고 하니 생각이 앞서가는 게 이해 못 할 행동이 아니긴 하다.


일요일 점심시간에 엄마가 정한 고깃집에서 남자친구, 엄마, 나, 이렇게 셋이서 만났다. 엄마는 남자친구와의 첫 만남 자리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올해 첫째를 결혼시켰으니 올해는 무리고 내년 봄쯤 둘을 결혼시킬 생각이다 라며, 나와 남자친구에게 결혼 생각이 있느냐는 식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혼자서 답을 정해놓고 말했다. 대신 남자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남자친구의 부모님에게 우리 필순이를 소개해줄 거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게 느껴졌다.


엄마가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은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오빠 이야기는 반드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엄마는 오빠가 마치 엄마의 유일한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 마냥 오빠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만나기 전부터 계속 오빠를 이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는데, 기어이 당일에도 대화를 하다가 문득 오빠를 부르겠다는 말을 꺼냈다.


나도 불편하고 남자친구도 불편하고 심지어 오빠까지도 '처음 만나는 자리에 내가 나가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 나중에 같이 보더라도 일단 첫 만남에서는 셋이서 보는 게 맞지 않겠느냐' 라고 의사표현까지 했는데, 굳이 왜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오빠를 부르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엄마의 어색함을 덜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혹은 엄마의 자존감을 위해서. 물론 나와 남자친구 모두 동의하지 않았기에 오빠는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남자친구에게 내가 나이가 많고 성격이 좋지 않고 비전문직이라서 남자친구의 부모님이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의 말은 내 나이와 성격과 직업에서 돌고 돌았다.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성격이 저렇다는 말도 하고, 눈이 많이 나쁘다는 신체적 약점까지 뜬금없이 언급했다.


내 단점이 남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건 대부분이 달갑지 않지만 특히 더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이 있다. 바로 내 과거의 실패담이다. 엄마는 내가 자격증만 잔뜩 따놓고 활용도 못 하고 공부한 것과 전혀 상관없는 전문성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즉 내가 한때 쓸데없는 짓만 주구장창 하다가 합리적이지 못한 결과값을 얻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굳이 해야만 했을까.


나는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서 수년에 걸쳐서 진절머리가 나도록 들었다. 이게 누군가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부분이지만 엄마의 입에서는 늘 부정적인 내용으로 오르내렸다. 엄마는 굳이 저런 말들을 왜 하는 걸까. 아마도 말은 해야겠고 할 말이 저런 것 밖에 없어서 일 것 같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말할 이유가 없다.


이유가 뭐가 됐든 엄마의 말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기준에서 이미 내 수준은 남자친구에 비해 열등한 존재임이 정해진 것 같다. 조언이랍시고 결혼한다고 해서 일을 그만 두면 절대로 안 된다는 소리까지 했다. 반대로 남자친구는 엄마 앞에서 내 칭찬을 많이 했다. 나를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엄마에게 마치 반박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더니 엄마가 맞장구치듯 내 칭찬을 이어갔다. 남자친구가 나를 좋게 봐준다니 조금 안심한 듯한 느낌이다. 칭찬의 내용은 소박하다, 저축을 잘한다, 신체가 건강하다, 대략 그 정도였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그동안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을 두어 번 반복해서 했다. 단어를 몰라서 그렇지 알았다면 아마 '비혼주의자' 라는 말을 언급했을 것 같다. 비혼주의자였던 딸이 당신을 만나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라는 말이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엄마 앞에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딱히 한 적이 없다. 그냥 결혼하겠다고 집에 데리고 오는 남자가 없었을 뿐이고, 뭔가 말하지 않아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진 모양이다. 정작 엄마와 나는 살면서 결혼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내 의견은 중요하지도 애초에 궁금해하거나 질문한 적도 없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딱히 나에게 돌아오는 질문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더더욱. 그나마 남자친구가 대화 막바지에 내게 말을 걸었다. 둘이 같이 있을 때는 안 그러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말이 없냐고. 나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사실 이 자리는 내가 대화를 주도했어야 할 자리인데, 이 자리에서 보여준 내 태도는 확실히 잘못됐다. 하지만 할 말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그 자리가 불편해서 언제 자리를 끝낼지 내내 눈치를 보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대화를 끊고 그 자리를 파했다. 밥값 계산은 엄마가 했다.


남자친구를 엄마에게 보여준 이후 엄마에게서 거의 매일같이 연락이 왔다. 집에 있냐, 오늘도 남자친구 만나냐, 밖이면 집에는 언제 들어가는데, 남자친구 부모님은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궁금한 것도 물어볼 겸 밥 사줄 테니까 만나자, 데이트할 때 입을 옷 사줄 테니까 만나자. 물음표가 점점 늘어간다. 간섭이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억지로 답장을 하다가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는 안 해도 될 싫은 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그 결과, 엄마에게서 다시 연락이 뜸해지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내기는 했지만 이러나 저러나 마음이 불편한 건 매한가지다.


나는 남자친구 외에는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없다. 타지에 사는,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는 오래된 친구 한 명이 남자친구 이외의 유일한 친구다. 장장 7년 동안이나 장기근속 중인 직장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없다. 남자친구 말로는 내가 자신과의 1대 1 대화에서는 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특히 2명 이상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말이 없고 행동이 부자연스럽다고 했다. 심지어 본인의 친엄마와의 관계에서도 입을 다물고 껄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을 최근에 목격했다.


나는 친구가 없을뿐더러 직장동료도 가족도 친척도 그 누구와도 친하지 않다. 남자친구의 판단에 의하면 이런 내 모습을 종합해 본 결과, 내가 선택적 함구증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자친구가 나의 현 상황에 문제를 느끼고는 둘이서 함께 해결책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래도 장기적인 관계 유지가 어렵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위기다. 나는 이 남자와 평생 함께 하고 싶은데 이 상태로는 위태롭다. 한편으로는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떠나서, 케케묵은 고질적인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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