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번지 국수집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 된다.
이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지금 맞는 건 그때도 맞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틀렸다고 느낀 건 지금도 틀렸다고 여길 확률이 높지. 단지 시간이 좀 지났다는 이유로 지난날의 부정적인 감정이 이제 와서 아련한 기억으로 둔갑하는 게 정말 가능한가? 혹자는 ‘세월 앞에서는 다 미화되는 것’이라 했지만 결국 미화될만한 것들만 미화된 것뿐일 테다.
문제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회기동을 향한 그리움이 꿈틀댄다는 거다. 고백하자면 나는 회기동을 사랑하지 않았다. 내 20대의 삶을 지도로 만든다면 가장 커다란 핀이 꽂혀야 하는 지역인데도. 즐거운 학교 생활과 인생 첫 독립과 풋풋한 연애 모두 이 동네를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그 막대한 비중에 비해 좀처럼 정을 붙이지 못 했다. 당시에 맹목적으로 동경하던 홍대앞과 비교돼서였을까? 클럽과 카페, 편집숍과 문화 공간이 즐비해 젊은 예술가와 힙스터들이 모여들어 활기 넘치던 홍대앞과는 달리 경희대 앞의 풍경은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정문과 가까운 구역으로는 학생들을 타깃으로 하는 값싼 식당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촌스럽기 짝이 없는 술집 골목을 살짝만 벗어나면 오랜 시간 큰 변화 없이 이어져 온 주거 밀집 지역이 나온다. 집 상태에 비해 말도 안되게 비싼 월세를 받아 한숨만 자아내는 낡은 빌라 건물들. ‘고즈넉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답답하고 지저분해 한가로운 산책의 즐거움도 꺾어버리는 거리. 게다가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라면 으레 겪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는 내가 사는 동네를 ‘서둘러 탈출해야만 하는 장소’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얼른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종로나 강남, 마포나 한남동으로 진출해야겠다는 다짐과 회기동을 떠나며 대학생 애송이 티를 벗어버리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나아가겠다는 욕망이 끊임없이 차올랐다. 그때 내게 회기동은 정착을 꿈꾸게 하는 터전이 아니었다. 임시적으로 거쳐가는 정류장 혹은 톨게이트 정도에 불과했다.
회기동을 떠나고 2년 반이 흘렀다. 가끔 나는 그곳을 떠올린다. 미련이 남아서는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회기동만 생각하면 동네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지면서 동시에 막을 수 없는 그리움이 아주 천천히, 스물스물 올라온다. 그리고 매번 그 풍경의 첫 장면을 장식하는 건 ‘79번지 국수집’이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학교 앞 식당. 2007년 경희대학교 정문 인근에 생긴 이후로 아직까지 같은 자리에서 닭국수와 전을 팔고 있다. 그사이 눈에 띄게 변한 거라고는 상호명뿐이다. 원래는 ‘다담 국수’였으나 상표권 분쟁에 휘말린 탓에 어느 순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다담이라고 부른다. 오래된 단골 대다수가 비슷한 마음일 거다. 적어도 내 주변에 “79번지 국수집 가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세 글자면 충분하다. “다담 고?” 부르기 쉽고 단어도 더 예쁘거니와 문자 그대로 ‘많은 이야기'가 담긴 가게를 향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려면 이쪽이 맞다. (실제로 ‘많을 다’에 ‘이야기 담’을 썼는지는 사장님께 여쭤보지 않아서 모른다.)
당시 한 그릇에 5,000원 하던 얼큰닭곰탕은 가난한 대학생 김정현 군에게 가장 ‘고마운’ 식사였다. 저렴해서 고마웠다. 저렴한 것에 비해 양이 많아 고마웠다. 양이 많은 것에 비해 빨리 나와서 고마웠고, 언제 먹어도 한결같이 맛있어서 최고로 고마웠다. 한마디로 가장 ‘만만한’ 식사였다고 표현하면 사장님 기분이 묘하게 언짢으려나? 그러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복학생 정현 군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만만함이었음을. 국어사전에서 ‘만만하다’를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만만-하다 1
(1) 연하고 보드랍다
(2) 부담스럽거나 무서울 것이 없어 쉽게 다루거나 대할 만하다.
다담의 닭곰탕은 (2)에 정확히 부합하는 식사다. 주문할 때 일체 “부담스럽거나 무서울 것이 없”었다. 시원한 냉수 먼저 들이키고 반찬 그릇에 새콤한 김치를 덜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뚝배기가 등장한다. 8시간 이상 우려냈다고 하는 진한 닭 육수에 흰 쌀밥과 소면, 숙주와 대파, 깨가 듬뿍 올라간 닭고기가 들어 있다. 뭉쳐 있던 다대기를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니 금세 국물은 붉어지고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두 번의 심호흡 후에 밥과 국물과 숙주와 닭고기를 한데 올려 크게 한 입 밀어 넣으면… 구수하고 깊은, 동시에 깔끔하고 개운한, 그러니까 어른들 용어로 거 참 ‘시원~한' 곰탕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보고만 있어도 푸짐한 것이 가성비 지킴이 김혜자 선생님도 인정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이 든든한 밥상은 막막한 취업 준비와 빈약한 통장 잔고와 도무지 풀리지 않는 만성피로 따위를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다. 다담에서 나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뜨끈한 밥 한 숟갈 떠먹고 나니 다시금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아닌가. 먹은 만큼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욕도 차올랐다. 아직 젊음 만큼은 어디 가지 않았구나! 겨우 이것 뿐이지만, 어쩌면 이것만이 전부일지도 몰라. 배불리 먹고 일어나자. 일어나서 캠퍼스 좀 걷자. 걸으면서 마음을 비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해보는 거야. 그러다 힘들면 또 한 그릇 먹으러 오면 된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훈민정음이 새겨진 전등 아래에 나를 반기는 자리가 넉넉하게 놓여 있다. 거기 앉아 자주 힘을 얻었다. 미약한 힘이나마 나누고 싶어서 선배를 여자친구를 아빠를 데려 왔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닭곰탕 국물을 비우고 나면 하나같이 활기를 띤 얼굴로 문을 나서던 걸 기억한다. 말 못할 고민이나 짜증 따위도 걸쭉한 육수와 함께 개운하게 삼켜버렸을 거라 멋대로 추측해본다. 이 집을 가장 만만한 식당으로 여긴 건 나뿐만이 아니었겠지. 빅데이터 맛집 검색 플랫폼 ‘다이닝코드’에는 이런 리뷰가 적혀 있다. “복학생의 설움(?)을 어루만져준 식당. 긴 말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닉네임 ‘또먹니’님이 속으로 삼킨 긴 말. 그 괄호에 숨겨진 내용을 나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여전히 헷갈린다. 다담이 그리운 건지 회기동이 그리운 건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나의 옛 동네를 찾아 가보려 한다. 얼큰한 닭곰탕 한 그릇 먹다 보면 어느 쪽이든 판단이 설 테다. 1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은 채 회상에 푹 잠길지도 모르겠다. 부드러운 고기가 땡기는 귀갓길에 찾곤 하던 할머니보쌈과 반복재생되는 매장 플레이리스트를 지겨워 하며 고소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앞에 놓고 4-5시간씩 전공 수업 과제에 열중하던 커피메소드. 돼지불백도 맛있지만 밑반찬으로 나오는 분홍소시지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솔낭구와 오레오 범벅 아이스크림을 포장할 때마다 어떻게 이 안에 요거트를 넣을 생각을 했냐며 감탄을 거듭하던 와요. 하루빨리 학교에서 멀어지고 싶다며 궁시렁대면서도 계절마다 달라지는 캠퍼스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던 20대 정현 군의 못생긴 얼굴까지. 혹시라도 회기역에서 주책 맞게 혼자 울다가 웃는 수상한 털보남을 발견한다면 부디 그냥 지나쳐주시길 바란다.
79번지 국수집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13길 25 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