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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May 14. 2019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텔레비전

이 영리한 텔레비전 키드처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공공의 적이다. 많은 이들에게 미움받는다. 미워하면서도 쉬이 떨쳐내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어쨌든 환대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바보상자’라는 별칭이 잘 보여준다. “텔레비전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공신력(?) 있는 표현이다. 사전까지는 안 뒤져 봤어도 다들 어린 시절에 한 번쯤 들어 봤을 거다. 허구한 날 TV만 보고 있으면 바보가 된다는 노파심을 담은 말일 터인데, 참으로 직관적인 이 단어는 많은 부모들이 집에서 TV를 빼 버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심지어 사회 운동가 ‘제리 맨더’는 『텔레비전을 버려라』(우물이있는집, 2002)라는 책까지 썼다. TV가 권력 행사의 효과적 수단으로 복무하며 인간의 경험과 창의성을 가로막는다는 게 글의 요지다. 궁극적으로는 텔레비전을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수준을 넘어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만이 해답이라고 주장했으니, 이만하면 텔레비전을 향한 미움이 단순한 미움을 넘어 공포와 경계로까지 인식되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파괴해버릴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바보상자의 위험성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TV는 바보상자가 아니다. 물론 제리 맨더를 비롯해 다수가 지적하는 텔레비전의 폐해를 외면하기란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반박 논거들을 설명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건 이 글의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만큼은 ‘선물상자’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그에게 빚진 인생을 살아왔으니 은인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지도. 누군가에겐 파괴적인 존재가 누군가에겐 더없이 조력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텔레비전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다.    




(c) Aleks Dorohovich




전라북도 익산의 호기심 많은 한 꼬맹이를 떠올려보자. 인구 30만의 중소도시에 살던 내가 우물 밖 세상을 생생히 구경하고 더 많은 상상을 펼칠 수 있는 방법에 또 무엇이 있었을까. 텔레비전은 나의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네모난 화면 속에서 세상을 발견하고 그 너머를 마음껏 꿈꾸는 것이야말로 꼬맹이 삶의 낙이었던 것. 하루 종일 TV 앞에만 붙어 있어도 부모님은 별말 없이 내버려 두셨는데, 바보상자 덕에 아들이 오만가지를 꿰뚫고 있는 잡학박사가 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해외 지리 및 문화’ 같은 게 대표적이다. 세계 각국의 수도와 주요 도시들을 달달 외우는 나지만, 실제로 바다를 건너본 경험은 한 번에 불과하다. 낯설기만 한 외국에 관련된 각종 지식은 대다수 브라운관을 타고 전해졌다. 딱히 한 건 없다. 방에 앉아 유럽 축구리그를 보다 보니 웬만한 유럽의 국가와 도시명, 국기를 외우게 됐고, 케이블 영화채널의 재탕 영화나 다큐멘터리 속에서 그곳의 풍경과 삶의 방식을 목격했을 뿐. 연예인들이 호화롭게 여행 다니는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해당 국가와 도시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면서도, 한국 사는 외국인들이 몰려 나와 토론하는 방송을 통해서는 실제로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떤 생활을 영위하는지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TV 앞을 지키고 앉은지 어언 이십 년. 그 사이 중고등학교 사회 교과나 대학 수업들 속 해외 지리 및 문화 파트는 애들 장난 수준이 되었다.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지명에 쩔쩔 매는 이들에게 얼마나 우쭐댔는지는 비밀. 나에겐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쉽고 익숙한 차원을 넘어 순수한 재미와 즐거움으로 다가왔으니, 이 정도면 진정한 ‘배움’이라 칭해도 무리는 없겠지. 심지어 요즘엔 내가 기획하고 구상하는 잡다한 콘텐츠에까지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 중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텔레비전이 선사한 행운 중 하나다. 원체 말이 많은 데다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대화 나누길 좋아하는 성향이니 토크쇼와 인터뷰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얼마나 반가웠겠나. <라디오스타>(MBC)로 대표되는 신변잡기 위주의 토크 예능부터 <무릎팍도사>(MBC),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TVN) 같은 인터뷰쇼, 한 사람의 일상과 철학을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휴먼 다큐멘터리까지.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별의별 인간 군상과 수다 떨어볼 수 있었다.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 이토록 다른 우리가 그럼에도 대화와 이야기라는 통로를 통해 서로에게 닿을 수 있구나. 그게 그렇게 신기하고 경이로울 수 없었다. 



더 재밌는 건, 그 과정을 지나며 나 자신을 자주 들여다보게 됐다는 사실이다. 형형색색의 화면이 선사하는 다채로운 재료들로 생각과 경험을 구성하며,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요컨대 나는 TV 속의 네모난 세상에 그치지 않았다. 거기서 발견한 세상을 바탕으로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새로이 만들어 나갔다. 알게 모르게 전파가 인도하는 삶을 살았으니, 이만하면 오늘날 ‘나’라는 기업의 최대주주는 영락없이 텔레비전인 셈. 개의치 않는다. 모두들 바보상자라고 욕하지만 바보상자가 없었다면 내가 바보로 남았을 테니까. 거듭 강조하지만 텔레비전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다.   



쉽게 공감하기는 힘들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굳이 텔레비전의 좋은 점만을 강변하기도, 더 나아가 ‘파괴적 속성을 지닌 것도 때때로 긍정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블라블라’ 따위의 원론적이고 뻔한 말들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솔직히 그냥 자랑이 하고 싶었다. 나를 파괴할 수 있었던 것도 나는 이렇게 잘 이용해먹었습니다. TV를 너무 무서워하거나 미워하지 마세요. 잘만 구슬리면 충분히 친해져서 도움받을 수 있다. 이 영리한 텔레비전 키드처럼 말이다.




                                                                                                             * [파사드 Vol.2 파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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