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는 제2의 창작자니까.
에디터는 제2의 창작자니까. 너무 거창한가?
이따금 일종의 억울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콘텐츠를 접할 때가 그렇다. 하나의 콘텐츠가 우리 앞에 도착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 콘텐츠의 주인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바보 같은 질문이다. 모든 콘텐츠는 여러 사람이 협업하여 완성하는 결과물인데 거기에 어떻게 독점적 주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보게 만드는 건 더 바보 같은 현실이다.
완성된 작품 앞에서 우리는 대개 작가라는 사람의 이름만 기억한다. 그 외의 것들은 자연스레 지워진다. 처음 콘텐츠를 구상하고 이를 구체화하는 시간이나, 관련 아티스트를 섭외하여 서로 조율하며 타협점을 찾아가는 단계 같은 걸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콘텐츠 제작 과정을 전반적으로 담당하고 책임지는 이에게 눈길이 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당연한 일이 나는 좀 억울하다. 그러니까 콘텐츠의 기획과 편집을 총괄하는 에디터의 역할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에디터를 제2의 아티스트나 작가라고 부르는 건 너무 지나칠까? 결국 능력 있는 에디터가 없으면 좋은 콘텐츠도 없는 법인데 말이다. 굳이 억울함의 감정까지 느껴가며 에디터의 역할을 강조하는 건, 사실 내가 에디터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잡지의 피처 에디터를 맡고 있지만 앞으로 잡지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을 하고 싶다. 꽤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다.
나는 왜 에디터의 세계에 뛰어들고자 하는가. 간단하다. 좋아하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라서. 언젠가 누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나는 ‘전달’이라고 답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다른 이에게 표현하고 설명하는 것. 이건 전형적인 이미지의 창작과는 다르다. 나는 골방에 틀어박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 타입이 못 된다. 그렇다고 또 만들어진 작품을 가만히 앉아서 감상만 하는 위치는 성에 차지 않는다. 꽤 오랜 시간 냉정한 현실 직시와 자기객관화를 거쳐오며 도달한 결론은 그 중간 지점, 더 정확히는 ‘창작자의 바로 한 걸음 뒤’가 내 자리라는 것이다.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에서, 잡다한 재료들을 이리저리 활용하여 나의 언어로 재가공하는 일. 그렇게 편집한 내용을 적절한 형식에 얹어 전달하는 일. (최대한 좋게)말하자면 작가나 예술가보다 편집자, 기획자에 어울리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에디터라는 게 그렇다. 에디터는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을 비주얼과 텍스트 혹은 그 외 요소들을 활용하여 전달한다. 콘텐츠의 전체적인 컨셉과 테마를 세우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 공간, 사물, 작품 등의 다양한 재료들을 물색한 뒤 이들과 함께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주제 구상 및 컨셉 기획부터 섭외와 협찬 문의, 자료 편집이나 원고 작성까지 에디터는 해당 콘텐츠의 전 과정을 책임지고 진행하는 일종의 디렉터인 셈이다.
창작이라 하기엔 이것저것 신경 쓰는 게 많은 데다 생각보다 전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창작이 아니라고 하기엔 그 비중이 너무 크고 중요하다. 요컨대 에디터는 ‘제2의 창작자’다. 예민한 안테나로 다양한 원석들을 캐치하여 이를 가장 매력적인 방식으로 재가공하는, 숨겨진 또 다른 아티스트. 책과 잡지, 전시장과 라이프스타일숍, 웹과 모바일 플랫폼에서 고유의 특색을 가진 콘텐츠를 받아볼 수 있는 건 에디터가 밤낮으로 기획하고 편집하는 과정이 있기에 가능하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나는 정말 에디터 하기 위해 태어난 건가 싶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필드의 최전선에서 화려하게 돋보이는 자리가 많이 부담스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관심은 또 좋아하는지라 나름의 중요한 몫을 해내며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는 간절히 원한다. 그렇게 운명처럼 나는 에디터라는 역할을 만났다. 당연히 앞으로도 쭉 만나고 싶을 뿐이다.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예술가는 지상으로부터 20cm 떨어진 존재라고. 너무 높이 날아올라 바닥의 공기를 외면해서도 안 되고, 늘 땅에만 붙어있느라 저 너머의 새로운 풍경을 놓쳐서도 안 된다. 지면에서 딱 20cm 떠올라 그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 훌륭한 예술가다. 그렇다면 난 이렇게 표현하겠다. 에디터는 까치발을 들고 서 있는 존재다. 언제라도 손을 뻗어 아티스트를 부를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유연하게 지상과 상공을 넘나들며 시야를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에디터가 되고 싶다.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까치발을 들 수 있는 사람. 당장이라도 종아리 운동을 시작해야겠다.
* [브레이크 매거진 Vol.22 Hidden]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