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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May 16. 2019

싫어합니다 존중해주세요

싫다니까요.





어합니다 존중해주세요 




광화문의 한 카페에 갔을 때다. 들어서자마자 사랑에 빠질 뻔했다. 햇살이 쏟아지는 커다란 통유리창과 너머로 보이는 소박한 정원, 우아하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뽐내는 오래된 가구들까지. 아, 여기가 파리인가? 참으로 낭만적인 오후로구나.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한 시간을 채 못 버티고 도망 나왔다. 음악 때문에. 에디뜨 피아프의 샹송, 아니 적어도 잔잔한 재즈나 보사노바 정도는 나올 줄 알았다. 이게 웬걸. 난데없이 다비치와 먼데이 키즈가 튀어나와 여자의 마음이니 남자의 마음이니 세상 서럽게 울부짖는 것이다. 크게 당황하고 있는 틈을 타 창정 형님이 목놓아 부른다.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파리는 사라졌다. 소몰이와 주정의 콜라보가 울려 퍼지는 신림역 혹은 수유사거리만 어른거릴 뿐. 나의 소중한 오후는 증발해버렸다. 낭만도 여유도 모두 함께 말이다. 



고백한다. 나는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음악 선곡을 싫어한다. 공간의 성격과 분위기 따위 아랑곳 않고 마이웨이 가시는 음악을 마주할 때면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 카페든 술집이든 상점이든 어떤 공간에서 음악을 틀어 놓는 목적은 공간의 분위기를 형성하고자 함이 아닌가? 혹여 주인장의 분명한 의도가 없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작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음악은 일종의 인테리어로도 기능한다. 해당 공간의 컨셉과 아이덴티티를 해치는 음악은 옥에 티나 다름없다. 기본적인 사실을, 공간을 누구보다 애정하는 주인장들이 정녕 모른다고? 모른다면 자격 미달이요, 안다면 직무유기일 테다. 



핀잔도 듣는다. 세상 까다롭고 예민해서 어떻게 삽니까. 이해 못한대도 상관없다. 다만 좀 억울하다. 그들이 괜히 한 소리라도 더 보탠 건 단순히 ‘이해 안 가서’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아서’니까. 공간에 어울리는 탁월한 음악 선곡을 사랑한다고 노래를 불러도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볼까 싶다. 유별나다 여겨도 그러려니 하겠지. 방점은 ‘불만과 짜증의 표현’이라는 데 찍힌다. 말하자면 이것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말할 때 견뎌야 하는 시선의 문제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여전히 부정적인 것에 부정적인 시대다. 한국 사회는 모든 자기만의 선명하고 확고한 생각과 의견을 경계하는데, 그 내용이 화, 불만, 싫음 따위에 관한 것이라면 잣대는 특히 더 엄격해진다. 그러니 ‘나’에 대한 설명은 오로지 웃음과 긍정의 몫일 수밖에.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김브뤡이라고 하고요. 아재들 우르르 몰려나와서 가오 잡는 영화랑 갤러리에서 따발총 마냥 터져 나오는 카메라 셔터 소리를 안 좋아합니다.” 앞에 앉은 이들의 표정, 안 봐도 보인다.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 얼마 없는 게 현실이다. 대체 왜?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정말 밝고 환하고 좋은 것들만 있다는 말인가. 



친구 B는 버스킹 공연 시 휴대폰으로 가사를 보며 노래하는 사람들에 불만이 많다. 준비 안 한 티를 대놓고 낸다는 이유에서다. 뮤지션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없거니와 노래 부를 수 있는 거리 무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라고 B는 말한다. “내가 내 노래를 정말 사랑하고 노래할 수 있는 모든 무대를 귀중하게 여긴다면, 거기가 길거리라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 그럼 가사 숙지는 기본 중에 기본 아니야?”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고는 자유다. 각자가 다 다르게 느낄 거다. 다만 이 말이 B라는 사람을 조금은 더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예술가이자 예술 애호가 또는 감상자로서 그녀는 ‘태도’에 민감하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창작물을 바라보는 태도. 세상으로 발화하고 표현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 더 철저하고 더 완벽하려 해도 부끄러움과 후회는 어떻게든 남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노력과 준비마저 손쉽게 저버리는 이들을 B는 납득할 수 없다. 홍대 중심가를 지날 때마다 한숨 푹푹 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 언젠가부터 온라인상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말이다. 당신의 눈에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이건 제 취향이니 그냥 존중해주시죠, 라는 뜻을 가진 아주 현명하고 명료한 문장이다. 나는 살짝 바꿔보고 싶다. ‘싫어합니다, 존중해주세요.’ 우리 이제 좀 당당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그게 가능한 분위기가 돼야 한다. 내가 불만과 짜증을 느끼는 것이 어느 누군가를 배제하고 차별하고 혐오하는 방향으로 향하지만 않는다면, 문제 될 건 전혀 없지 않을까. (무척 중요한 지점이다. 표현의 자유가 혐오와 폭력으로 번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할 거다.)



다행히도 요즘은 뿌듯할 일이 많다.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싫존주의자’들의 용기 있는 선언이 터져 나오는 중이다. 유독 눈에 띄었던 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대단하다. 오이를 싫어한다는 건 소위 비주류 취급을 받아왔는데 그 통념을 정면으로 들이 받았으니까. 페이스북 페이지 팔로워가 무려 11만 명이 넘는다. 깜짝 놀랐다. 사실 난 오이를 좋아하거든. 새콤한 초장에 푹 찍어 먹는 시원한 오이 한 조각이란…! 하지만 존중합니다. 강요 따위 없으니, 마음껏 싫어하세요. 우리에겐 싫은 것을 싫어한다고 말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 [브레이크 매거진 Vol.20 anecdote]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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