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창덕궁길과 계동길을 걸으며
산책 좋아합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할 때 꼭 덧붙이는 이야기가 있다. 골목 걷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더라고요. 화려하고 번잡한 대로변에서 한두 블록만 들어가면 나오는 여러 갈래의 골목길. 각기 다른 넓이와 방향과 색깔을 가진 다양한 골목들을 걷다 보면, 이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그런 점에서 종로의 수많은 골목은 훌륭한 산책로가 되어준다.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뚜렷이 느낄 수 있고, 매우 다채로운 유형의 공간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며, 익숙함에 가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곳. 볕이 내리쬐는 5월의 어느 날, 금세 더워질까 서둘러 찾은 종로의 골목을 아주 천천히 걸었다.
원서동 창덕궁길
안국역에서 나와 창덕궁을 향해 걷는다. 거대한 현대 사옥과 ‘힙’하기 그지없는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지나면 어느새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이 보인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따로 있으니 들어가지 않기로. 대신 걸음을 살짝 돌려서 옆길로 빠져본다. 원서동 창덕궁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이 동네는 누군가의 표현처럼 “창덕궁의 돌담을 제집 담으로 삼”고 있다. 길게 뻗은 돌담 덕분에 골목 전반에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돈다. 시야를 방해하는 우악스러운 건물도 없고 담 너머로 울창한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어 계절의 변화를 뚜렷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동네 주민과 상인들이 부러운 첫 번째 이유다. 요즘 같은 날엔 틈만 나면 바깥 풍경을 바라보겠지?
이 동네가 부러운 두 번째 이유.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궁 바로 옆에 위치한 골목이라 그런지 몰라도 여전히 느린 속도를 살고 있다는 인상이다. ‘해동공사’라 적혀진 저 리얼 빈티지 간판이 말해주지 않는가. 모르긴 몰라도 족히 2, 30년은 이 자리에 버티고 있었을 것 같다. (수도부터 페인트, 샷시, 타일까지 못 하시는 게 없는 거 보면 보통 내공은 아니실 거다.)
근데 또 바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는 ‘덴보드’라는 인테리어 업체가 꽤 세련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같은 인테리어 분야라도 전혀 다른 감각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두 가게처럼, 창덕궁길엔 시간의 격차를 뛰어넘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공간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이 동네에 단순한 부러움을 넘어 애정까지 느끼게 된 건 그래서다. 오래된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니까. 세월의 자취가 여전히 짙게 배어 있으면서도 그 사이사이로 젊고 새로운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먼저 있었던 것이 새로운 것을 배척하거나 새로 들어오는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을 내쫓는 게 아닌, 서로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는 풍경.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묘한 이질감으로 버무려진 원서동 창덕궁길은, 평화로우면서도 개성 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골목을 한참 걸어오다 보면 고희동 가옥을 발견하게 된다. 고희동 가옥은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1918년부터 41년간 살았던 집이다. 서양 가옥과 일본 가옥의 요소를 두루 섞어 지었다고 하는데, ‘건알못’인 나조차도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느껴지는 고요하고 정갈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친절하고 유쾌한 관리인 덕분에 고희동 화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전해 들을 수 있었던 짧지만 알찬 관람.
북촌 계동길
고희동 가옥과 ‘텍스트 커피’ 사잇길로 쭉 올라갔다 내려가면 중앙고등학교가 나온다. 멈추지 않고 계속 직진하면 북촌 한옥마을로 이어지는데, 그러지 않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여기서부터 계동길이 시작된다.
하교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문방구 앞에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중앙고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멋진 동네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삼청동 부근에 있는 덕성여고를 지날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나 같으면 점심시간마다 밖으로 뛰쳐나와 이 골목 저 골목을 구경하고, 하굣길에는 한옥마을까지 산책하다 해가 다 지고야 집에 돌아갔을 거다. 분명 이 학교에도 나처럼 멋을 좀 아는 친구들이 있겠지 싶다가, 이내 나의 지난 학창시절을 떠올리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 길이 유독 더 정감 가는 건 가게마다 한 장씩 걸려 있는 흑백사진 때문이다. 물나무사진관에서 진행한 ‘정박의 기억;계동2018지도’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계동길에 위치한 각 가게의 주인장 모습을 사진에 담아 외벽에 걸어두었다. 사진뿐만 아니라 글로 적어 놓기도 했다. 계동떡방앗간의 사장님 내외가 그런 경우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며, 20여년이 넘도록 한 자리를 지킨 이들의 세월은 어떤 궤적을 지니고 있을까 짐작해봤다.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동네의 역사를 상상해보는 일은 소중했다. 전부 이 골목에 쌓여가는 시간을 기억하고 지키려는 이들 덕이다.
골목을 나오며
애정이 가는 장소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그런 곳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며 설령 알게 됐다 하더라도 굳이 큰 관심을 가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더욱 산책의 여정이 귀하다. 골목 구석구석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보석 같은 순간들을 수없이 마주치니까. 우연한 발견을 거듭하다 보면 그 중에서 하나쯤은 눈에 들어오지 않겠나. 거기서 발길 닿는 대로 조금 더 들여다보고 기웃거릴수록 자꾸만 정이 가는 장소를 갖게 되는 법이다.
종로의 창덕궁길과 계동길도 그렇게 만났다. 뜻하지 않게 들어선 골목길이 이제는 몇 번이고 다시 찾고 싶은 곳이 되었다. 앞으로도 다른 시간 다른 계절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 다녀야지. 그때도 해동공사의 간판은 그대로일까? 6개월 뒤에도, 3년 뒤에도, 미미당의 맛있는 호떡과 떡꼬치를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 The ICONtv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