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공연은 마지막 한 곡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피아노 연주자는 마이크를 향해 몸을 숙인다.
"마지막 곡으론 칼라 브레이의 Lawns 들려드릴게요. Lawns는 제목 그대로 광활한 잔디밭을 조용히 걷는 것처럼 평화롭고 섬세한 느낌을 주는 곡이에요. 그 잔디 위를 함께 걸어보시죠."
천장에 달린 노란 조명 세 개가 무대 위 연주자를 은은하게 비춘다. 좌측의 피아노, 중앙의 콘트라베이스, 우측의 드럼이 조명을 받아 빛난다. 이곳은 어느 재즈 트리오의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재즈바이다.
어두운 관객석에는 어느새 관객이 거의 빠져 나가고 네 테이블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꽃다발을 들고 온 한 여자, 그리고 젊은 남녀 한 쌍이 무대와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있다. 그 뒤로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맨 뒤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연주가 시작되자 관객들은 각자의 생각에 잠긴다.
꽃다발을 들고 온 여자는,
익숙한 멜로디에 귀를 기울인다. J의 피아노 연습실에 놀러가면 그는 항상 이 곡을 연주해주곤 했다. 그럼 그녀는 언제나 그의 옆에 기대어 건반을 톡톡 건드리다가, 제 멋대로 가사를 붙여 노래를 했다. 그들은 음악에 빠졌다가 서로에게 빠졌다가 다시 음악에 심취하길 반복했다. J는 그녀가 좋아하는 이 곡을 무대에서도 연주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자신을 초대한 오늘 공연에서 이 곡을 연주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곡을 들으며 J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될 줄은 몰랐다.
베이스를 연주하는 이름 모를 그 이에게 눈길이 간 건, 그가 자신보다 키가 큰 악기를 안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그 악기가 내뿜는 중후한 매력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그가 쓰고 있는 안경때문이었다. 그녀는 문득 그 알 작은 무테 안경이 독특하다고 느꼈다. 뭐랄까, 좋게 말하면 을지로 뒷골목의 간판 없는 빈티지샵 사장이 쓰고다닐 것 같고, 나쁘게 말하면 근엄한 할아버지의 조간 신문 옆에 놓여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안경을 보자 그녀는 과연 그가 어떤 축에 속하는지 궁금증이 일었던 것이다.
그는 자유로운 개성을 지닌 보헤미안일까, 규율 있는 집안에서 자란 모범생일까.
과연 저 안경은 세심하게 기획된 멋스러움일까, 일상적으로 얹어둔 촌스러움일까…
그녀는 그의 안경에서부터 아래를 향해 조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했다. 의문스러운 안경을 떠받치고 있는 작은 코, 이렇다할 별 특징 없는 작은 입. 목 끝까지 채운 화이트 코튼 셔츠. 그녀는 밋밋하다,고 느낀다. '이런 식이면 당신에겐 23시의 재즈바보단 19시의 예술의전당이 더 어울린다고…'. 시선을 떨구어 스탠다드핏 브라운 슬랙스에 구겨넣은 셔츠, 그리고 그 위 졸라매진 가죽 벨트를 본 순간 그녀는 거의 결론을 내렸다. 그 쪽도 J와 같은 모범생 스타일이구나, 안경도 그저 어릴 때부터 써온 골동품이겠구나, 생각한다. 그렇게 점점 흥미를 잃어갈 때쯤, 그녀는 발견했다. 그의 바지 밑단 아래에 은근하게 보이는 노란색 양말을. 두툼한 진노랑 양말은 바지 밑단과 신발 사이 그 얇은 간극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가 연주를 위해 움직거릴 때마다 연녹색 도트 패턴도 조금씩 드러났다. 몇 송이의 프리지아가 그의 발목에 피어난 것 같았다. 그 양말은 멋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그런 류의 양말이었다.
자신의 키에 맞추어 딱 맞게 수선한 바지 밑단. 그 아래 2cm 정도 슬쩍 보이는 프리지아 양말. 대놓고 멋부리지 않은 이 치밀한 설계에 그녀는 재미를 느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안경을 다시 쳐다본다. 그 안경은 이제 분명 '멋스러움' 영역의 것이다. 그런 안경 아래를 받치고 있는 코는 오밀조밀 귀엽게 보이고, 앙증맞은 입술은 전반적인 이목구비와 조화롭다. 모범생처럼 단정하게 차려 입고는 안경과 양말로만 은밀하게 포인트를 준 것이 의뭉스럽게 느껴진다. 그녀는 이 보헤미안이 조금 궁금하다.
어느새 그녀의 눈은 그의 손을 따라다닌다. 피아노 멜로디보다 묵직한 베이스 소리가 그녀에게 은근하게 와닿는다.
여자의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는,
마음속으로 조용한 쾌재를 부른다. 그는 이것이 드디어 마지막 곡이라는 것에 기뻐한다. 그는 그 어떤 곡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연주되는 이 곡의 작곡가가 누구인지, 아니 이 곡의 제목이 무엇인지 조차도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음악을 듣는 것도 파스타 면을 포크에 돌돌 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그는 15000원의 자릿세를 내고 25000원 짜리 파스타를 먹으며 끈적한 음악을 듣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4만원, 아니 5만원을 내고서라도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느릿한 멜로디를 듣고 있자니 그는 숨이 더욱 콱 막혀오는 것을 느낀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조용히 그 숨을 내뱉었다. 발가락과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것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다. 화장실 가는 척을 해볼까, 담배나 한대 피고 올까, 얼른 집에 돌아가 차라리 빨래 걷기나 설거지를 하고 싶단 욕망을 느낀다. 그래도 공연을 즐기고 있는 여자친구를 바라보며, 마지막 일분일초를 무사히 버텨내자고 의지를 다잡는다.
이 남자의 여자친구는,
자꾸만 시선을 느낀다. 그것은 그녀 옆 그 익숙한 남자로부터 느껴지는 시선이 아니다. 그녀 뒤, 누군지 모를 어떠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시선이었다. 그 낯선 사람은 펜을 들고 노트에 무언갈 끄적이고 있다. 그녀로선 그것이 글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림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며 펜을 이리저리 놀리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그녀는 누군가의 뮤즈가 된 이 순간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 모델이 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의식되기 시작한다. 와인 잔에 다가가는 자신의 다섯 손가락, 잔의 스템을 잡는 손의 세기,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속도… 모든 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그만 고장나버린 손은 과속을 했고, 손에 들린 잔은 그녀의 앞니에 둔탁하게 부딪혔다. 긴장한 나머지 그녀는 이런 우스운 짓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이 바보같은 짓이 그림에 남는 건 아니겠지, 라고 걱정할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있다는 것을 깨닫곤 의도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려 노력한다. 긴 머리도 쓸어넘겨 깔끔하게 정리하고, 허리를 곧게 세운다. 그리곤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듯 연주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질문으로 가득하다. 이따 그림을 가져다주면 어떤 반응을 해야하지? 좋아해야하나? 몰랐던 척을 해야하나?
펜을 든 젊은 남자는,
모르는 사람을 몰래 그리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그는 이런 변태스러운 취미를 즐기기엔 재즈바가 적격이라 생각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움직임이 조용하다. 그런 정적인 인물을 바라보는 그의 동적인 시선은 어둠과 연주에 쉬이 묻힌다.
오늘도 그는 어김없이 자신 앞에 앉은 사람을 그리고 있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그녀의 부시시한 짧은 머리칼과 구부러진 등허리를 그려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얼굴을 화폭에 채워넣는 일에 애를 먹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지금껏 그가 그려온 수백개의 얼굴들과는 다르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이진 않으나, 음영진 굴곡만은 뚜렷하다. 자연스런 M자 헤어라인이 돋보이는 볼록한 이마, 미간으로부터 살짝 내려갔다 반동을 받아 치솟은 일직선 콧날, 옴폭하게 패인 인중, 미세하게 벌려진 도톰한 입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이어 턱으로 내려오는 곡선의 각도. 이 모든 굴곡은 그의 눈에 완벽하다. 그는 이 완벽한 각도를 자신의 손으로 재현하기 위해 그리고 또 그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려낸 것이 실제에 비하면 매우 형편없다고 느낀다. 그는 그녀의 머리칼과 등허리를 새로 그린 후 얼굴을 다시 채워 넣길 반복한다. 머리칼, 등허리, 얼굴, 머리칼, 등허리, 얼굴… 그러다가 그는 그녀가 슬며시 웃는 것을, 웃을 때 눈 아래 사랑스럽게 차오르는 애굣살을 보았다. 그는 도저히 그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굴곡을 그려낼 자신이 없어져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그 아름다움의 원형을 바라본다. 그는 멍하니 경외에 빠진다.
그가 깊은 경외에 빠진 이 중년의 여자는,
눈을 감고 조용히 연주를 느끼고 있다. 얼마만의 자유인가, 그녀는 생각한다. 10년 전만 해도 남편과 자주 공연을 보러 다녔었는데, 회한 담긴 아쉬움을 느낀다. 그와 함께 보았던 공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리니치 빌리지를 거닐다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홀려 무작정 들어갔던 한 재즈바, 경쾌한 비밥에 맞춰 그와 함께 춤을 췄던 기억. 그는 색소폰을 잡듯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을 감싸 엉성하게 춤을 췄었다. 아무도 그들을 모르는 그곳에서 그들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리듬을 즐겼다. 한곡만 더, 한곡만 더, 하다 거의 자정이 되어서 밖으로 나온 그들은, 어느새 대마 냄새로 뒤덮인 이국의 밤거리가 무서워 급히 뛰어 숙소로 돌아갔었다. 낯선 밤거리를 신데렐라처럼 질주하던 그들은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웃겨 깔깔거리다가도, 쉿! 주의를 끌면안돼, 하며 웃음을 참았었다. 그녀는 그때가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지금 그녀 옆에 그가 없다는 사실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4년 전 그들에게 아이가 생긴 후 그녀와 그가 함께 밤 외출을 하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남편을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그녀이지만, 그녀는 불현듯 아이때문에 포기한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손질하기 어려운 긴 머리칼을 포기했고, 허벅다리까지 올라오는 짧은 원피스를 포기했고,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를 포기했고, 남편과의 시간들을 포기했다.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아이를 갖지 않았어도 좋았겠다…’ 라는 생각이 덧붙는다.
이내 연주가 멈추자
공연장을 꽉 채운 수선스런 생각들은 모두
흩어진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이종현 트리오였습니다. 가시는 길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멘트와 함께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는다.
꽃다발을 든 여자는 J에게 달려가 꽃다발을 전해주고는 멋진 연주였다며 포옹을 한다.
함께 온 남녀는 감상을 나눈다. 여자는 마지막 곡의 여운이 짙다고 말하고, 남자는 흔쾌히 동의하는 표정을 보인다.
펜을 든 남자는 그림을 구겨접어 테이블 위에 두고 떠났고, 뉴욕의 여인은 재빨리 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그렇게, 그저 그렇게, 오늘 밤의 비밀들은 곧 아스라이 스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