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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계피 Oct 05. 2022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예술인은 누가 보호하지?(3)

사상검열이라는 위계 속에서 예술인의 생존권 문제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앞선 글에서 나는 지속적으로 위계의 문제에 대해서 주장했다. 왜 예술가들은 프로젝트가 엎어졌을 때 자신의 권리를 쉽게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걸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한겨레엔 측에서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하고 있다. 비단 나만의 문제일까. 나 역시 다른 예술가들처럼 나의 정신적인 평온을 위해서 이 일에서 영영 손을 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해답은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계속해서 쓰는 일 말고는 없지 않을까. 나의 사례를 바탕으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예술가들의 사례를 모으고 기록하는 것이 무지렁이인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친구들의 말을 빌리자면 ‘너는 지금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계란이다. 그것도 아주 작은 메추리알 정도 되는 계란 아닐까. 그럼에도 계속 쓰기, 나의 언어로. 그것이 작가로서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유일한 길이고 작가로서 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예술인은 누가 보호하지?” 첫 번째 글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평등전주(주관단체)와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주최단체)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제3회 페미니즘 예술제 <지구탈출>”에서 참여 작가로 선정된 10인 중 3인 작가(사랑해 작가, 치명타 작가, 이시마 작가)를 사상검열과 양심을 문제로 일방적인 프로젝트 하차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나는 이 사건을 유심하게 살폈다.



주최 측의 사상과 다른 결을 가졌다고 추측된다는 논리로 세 명의 작가를 하차시킨 것이 본 사건의 주요한 논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랑해 작가님과 연락을 취했고 다행스럽게도 작가님께서 연락에 응해주셔서 본 글을 끝으로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예술인은 누가 보호하지?”글의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이 시리즈를 따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드리고 싶은 당부가 있다.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예술가가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당하면 관할 고용노동부가 움직이는데 왜 예술가들은 제도의 구원을 바랄 수 없는가. 이 글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1cm라도 움직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현재 본 사건에 관련된 공론화가 진행 중이다.
공론화에 관련된 자세한 글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wh0vOYm4q8eDW7EtMrXA42CHBOZY4g9f/view




*본 이미지는 사랑해 작가의 작품을 재편집하였습니다.

*본 인터뷰는 텍스트 인터뷰로 진행되었습니다. 소정의 인터뷰 비용을 지불하였고 인터뷰 내용에 대한 저작권은 사랑해 작가에게 있습니다. 본 인터뷰 내용을 무단으로 인용하는 경우 법적인 조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한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관을 공론화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이와 같은 저작권을 준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직접 혹은 간접 인용을 하고 싶으신 경우 메일로 문의하시면 작가님과 상의 후 답변드리겠습니다.



1. 안녕하세요. 작가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사랑을 많이 빚지고 살아남은 사람, 빚진 사랑을 더 많이 / 더 널리 / 더 오래 갚아내고자 오늘도 살아내는 사람, 사랑해입니다. 시각예술에서 출발해 디자인과 기획, 퍼포먼스와 무대연기, 예술교육과 예술놀이 등 다양한 분야에 발을 디디고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합니다.


수많은 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수없이 낙인찍힌 몸으로 사랑과 환대의 이름을 점하고자 ‘사랑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데요,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올해 7월에 정체성으로 검열당하여 전시에서 부당하게 배제되는 사건을 겪었고, 현재 그 전시의 주최 단체인 ‘성평등전주’와 주관 단체인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를 상대로 공론화를 진행 중입니다.




2. 저는 본 사건이 위계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 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성평등”에 부합하지 않은 이와 같은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가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술인들이 이러한 위계에 자주 놓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프리랜서라는 지위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보호받기 힘든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위계가 발생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사상검열이 더해지는 위계의 문제가 발생하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입장을 여쭙니다.


전시 참여 작가로 최초 선정되었던 10명 중 3명(사랑해, 치명타, 이시마)이 검열을 통해 배제되었는데요, 전시 예정 작품이나 작가들의 참여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직 주최단체의 ‘추측’과 ‘단정 짓기’로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스스로 성산 업종 사자임을 드러내는 일에 부끄러워하거나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치명타 작가님과 이시마 작가님은 ‘성노동’ 개념의 사용에 긍정했다는 이유로 “성평등전주와 다른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전시작품이나 작가와의 대화 자리에서도 반성매매 운동에 반하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고 상정당해 배제를 통보받았는데요, 그 과정에서 해당 피해 작가들과의 사실 확인이나 의견 조율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배제 통보 이전에 작성했던 전시 계약서 안의 문장인 “전시기관은 예술 창작과 표현에서 작가의 견해를 존중하고, 작품 활동에 부당하게 간섭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본 계약과 관련해 분쟁이 발생한 경우 양 당사자는 상호 협의하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현실에서 전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견해 존중과 작품 활동의 자율성, 상호 협의 노력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주최 측의 검열과 책임 회피, 통보와 무시만이 존재했습니다.


저는 해당 사건에서 주최/주관단체가 참여 예술가 개인에 대한 사상검열을 행하고 이분법적인 진영논리에 기반하여 개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점, 그리고 계약서에 적힌 문항들을 무시하며 전시에 선정된 작가와의 충분한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계약 파기를 결정하고 통보하는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주관단체의 위계 권력을 행사한 점, 계약 해지 통보 이후에 피해 당사자 작가들에게 그 피해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무응답으로 일관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점 모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3. 이처럼 “일방적인 계약 파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예술 프로젝트의 구조에 대해서 저는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랑해 작가님의 경우, 프로젝트 초반에 일방적인 계약 파기를 경험하셨는데요. 이와 같은 계약 파기에 대해서 “공론화”라는 작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경위와 사유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정말로 조용히 전시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공론화를 감당할 정신력도, 체력도 스스로에게는 없었고 청년 예술가로서 전시 하나하나가 소중하기도 했고요. 공론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을 스스로의 당사자성을 밝히는 일이 이후의 제 작업이나 경력에 어떻게 작용할지도 두려웠습니다(이 지점에 대해서는 공론화 중인 지금도 여전히 두렵습니다).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풀어낸 기존 작업들’로 정당하게 포트폴리오 심사를 통과해 참여 작가에 선정되었던 ‘페미니즘’ ‘예술’제에서 ‘선입견’과 ‘권위’, ‘검열’, ‘배제’, ‘책임 회피’로 인한 피해를 입는 일이 스스로에게 내상이 크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게 진짜인가?


현실 부정도 많이 했었고요. 내가 얼마나 전시에 참여하고 싶은지, 이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를 어필하면 그래도 주최/주관 단체가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페미니즘’ ‘예술’제잖아요.


처음에는 저도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주최단체인 ‘성평등전주’와 직접 소통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메일에는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고, 그리고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한 채로, 성평등전주의 이메일 답신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저는 사과문을 발견했습니다.


[제3회 페미니즘 예술제 관련한 사과문]
제3회 페미니즘 예술제 작가 모집 공고에 전시장소와 관련하여 반성매매 가치를 기반으로 성매매 집결지 폐쇄를 한 장소인 점을 명시하지 않아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작가님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전주시사회혁신센터, 성평등전주,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


해당 사과문은 7월 22일 ‘전주시사회혁신센터 홈페이지’에 게시된 사과문으로, 하차 통보를 받은 작가 중 아무도 ‘사과문 게시’에 대한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과문이 올라온 줄도 모르고 있던 저는, ‘성평등전주’ J 소장의 직통 번호를 찾아보려 전주시사회혁신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시 포스터가 뜨고 나서야 하차 통보를 받은 작가 세 명의 자리가 다른 사람들로 메꿔졌음을 알았습니다.


왜 이 모든 과정이
정작 부당한 계약 해지와
하차 통보를 당한
세 명의 작가에게는
아무 전달도 되지 않은 걸까요?


저 모호하고 불분명한 사과문은, 애초에 저희를 향한 사과도 아니었던 걸까요? 게다가 세 명의 작가 모두 ‘공간의 장소성’을 문제 삼은 적 없었습니다. 반성매매의 가치에 반대했던 적도 없었습니다. 아마 반성매매의 가치와 공간의 장소성이 애초에 명시되었더라도 저는 전시에 지원했을 것이고, 포트폴리오 심사에 또다시 통과하여 또다시 배제당했을 것입니다. 주최/주관단체는 이분법적인 진영 논리 아래에서 ‘피해사실’의 초점을 흐리고, ‘피해 당사자’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세 명의 예술가는 ‘사건 경위가 포함된, 피해 당사자를 향한, 사상검열과 일방적인 배제에 관한 공식적인 사과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공론화 이전, <제3회 페미니즘 예술제 : 지구탈출>의 개막식 행사에서 사과를 요구하며 공개적인 1인 시위도 행한 바 있습니다.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는 시위 중인 제게 개막식 행사가 끝난 뒤 ‘성평등전주’의 J 소장과 이야기를 좀 나눠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대화 자리가 ‘성평등전주’가 저와 대화 의사를 가지고 만든 자리라고 생각했고, 중간자인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의 중재와 함께 삼자대면을 하는 자리라고 생각해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가 ‘성평등전주’의 의사와 관계없이 만든 1:1의 대면 대화 자리였습니다. ‘할 말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었던, ‘이미 작가들에게 일방적인 권위를 행사한 뒤 무시로 일관했던’ ‘성평등전주’의 J 소장은 사과는커녕 같은 말과 같은 태도로 일관하다 먼저 자리를 떠버렸고, 이렇게 권력관계가 분명했던 1:1 대화에서 저는 또다시 <페미니즘예술제>가 내건 가치였던 ‘안전’과 ‘평등’, ‘자유’, ‘신뢰’가 아닌 ‘폭력’과 ‘불평등’, ‘배척’만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는 저에게 어떤 중재도, 보호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공식 사과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론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안전하게 전시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하며 메일을 보냈을 때 답장을 받아 소통과 조율의 과정을 거칠 수 있었더라면, 계약서에 적혀있던 대로 전시 참여에 관련해 ‘상호 협의’를 할 수 있었다면, 저는 1인 시위를 하는 용기를 낼 일도, 공론화라는 큰 용기를 행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하는 어떤 개인적인 행동도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고 사과를 이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예술가 개인’이 얼마나 힘이 없는 존재인지를, 주최/주관 단체의 권력이 얼마나 수직적일 수 있는지를 이번 사건을 통해서 끊임없이 깨닫고 있습니다. 공론화를 통해 이들이 행하고 있는 검열과 배제의 실태를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동시에 일방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참여 작가 개인에게 무응답과 무시로 일관하는 이들에게 더 큰 스피커를 가지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4. 프로젝트가 엎어졌을 때 예술가에게 정당한 보상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누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표준계약서의 ‘손해배상’ 부분에는 “당사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본 계약을 위반하는 경우, 그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발생할 모든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다만, 전조 제1항의 사유(천재지변 또는 기타 불가항력)로 본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경우에는 손해배상책임을 면한다”의 문장이 적혀있습니다. 천재지변이 아니고서야 부당한 계약 파기의 경우에 계약 당사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로젝트가 엎어졌을 때에도 저는 당연히 계약서에 적힌 계약 주체가 책임을 지고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해 피해 당사자가 당연하게 ‘발생한 모든 손해’를 청구하여 보상을 받아낼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요.


사실 법률적인 지식이 0에 수렴하는 저로서는, ‘계약서가 잘 작성되고’, ‘계약서의 사항들이 잘 이행되고’, ‘계약 파기나 분쟁, 손해배상 청구 역시 계약서를 잘 따를 수 있게 되는’ 일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약서의 사항들이 이행되는
일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주최/주관 단체의 권위 아래에서 작가 개인이 ‘을’이 되어버리는 경우에도 그렇지만, 여전히 예술계에는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을 수행하거나, 구두계약을 먼저 한 뒤에 계약서를 늦게 쓰는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5.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예술가로서의 생존권 문제에 대해서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님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전시나 공연 등 프로젝트 계약서를 쓸 때마다 “이 정도밖에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예산이 부족해서……”를 말하는 사람들과 그 작은 기회들을 “아유, 아니에요. 감사합니다.”하고 붙드는 예술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모두가 가난한 예술계 안의 모든 노동자들……. 사비를 지출해 책을 내고 전시를 하고 공연을 올리는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돈을 받고 작품을 발표하는 기회’가
소중해진 것, 이상하지 않나요?


문화예술이 시민이 향유하는 사회 자산이고 공공의 것이라면, ‘내 작업을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보여주는 일’에 대한 정당한 금전적 대가에 대해 왜 우리는 이렇게 절실해야만 할까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돈을 주는 자(고용자)’와 ‘돈을 받는 자(피고용자)’의 갑-을 관계는 예술가의 계약관계에게도 분명하게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제가 공론화 중인 주최단체인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에는 항상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3회 페미니즘예술제 : 지구탈출> 전시의 기획인 단으로 참여를 하시며 중간자의 역할을 수행하셨지만, 주관단체인 ‘성평등전주’와 용역계약으로 묶여계신 것으로 알아요. 사실상 그 계약상의 위계 아래에서 어떤 입장을 뚜렷하게 표명하기 어려우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책임을 회피해오신 건 정말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도 ‘성평등 전주’이라는 상위기관으로부터의 갑질 피해자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예술노동자도 노동자로
인정받고 대우받기를 바랍니다.


예술노동자를 포함한 사회 안의 모든 노동자의 처우가 더 나아지길 바랍니다. 모든 노동자가 더 나은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할 수 있기를,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6. 본 사건과 인터뷰에 대해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연대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이 사건에 관심 가져주시고 먼저 말 걸어주신 김계피 작가님께도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예술을, 그리고 삶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술노동자도 노동자로 인정받고 대우받기를 바랍니다.”


사랑해 작가의 인터뷰 중에 마음에 남는 구절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를 꼽자면 바로 이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고 퀴어 당사자로서 해당 사건의 문제에 깊이 공감한다. 계약서는 예술노동자(작가, 아티스트)와 기관의 평등함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서는 이 평등함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지향하는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움직임과 결이 맞지 않았다면, 사랑해 작가가 지적하고 있듯이 사랑해 작가는 애초에 프로젝트에 선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거다. 사랑해 작가는 그들의 심사 기준을 통과했다. 페미니스트 당사자로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관 기관과 주최 기관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심사를 통해 작가를 선별한 뒤에,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진영 논리를 이용하여 작가 개인의 사상을 검증하고 검열하려고 했다. 그렇기에 사랑해 작가를 강제로 하차시켰다.


“제가 하는 어떤 개인적인 행동도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고 사과를 이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문장에서 깊은 절망을 느꼈다. 우리가 이 사건에 연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점에 있다. 예술가 개인의 움직임은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겨레엔의 경우 뉴스페이퍼를 통해 기사가 나갔음에도 아직까지도 어떤 사과문도, 어떤 공식적인 입장도 내놓고 있지 않다. 나도 그렇지만 사랑해 작가님도 앞으로의 활동에 이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가 슈퍼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의 이런 불합리성을 문제 삼아서는 안된다는 시각도 있는 것으로 안다. 당신이 제도 안으로 들어가서 바꾸면 되지, 제도 바깥의 신인 예술가로 있는 동안은 이런 문제를 숨기라는 조언도 받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삶은 지금의 연속이라고 믿는다. 지금 닥친 문제를 지금 이 순간에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지금 닥친 문제를 지금 해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발생할 더 큰 사건들에 우리는 제대로 대비하지도 못하고 무자비하게 당할지도 모른다. “안전하게 전시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고 싶었을 뿐인 예술가들은 안전하게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고 그 책임에 죄송하다는 미사여구 몇 마디가 전부라면, 예술가들의 통장은 죄송하다는 말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그것은 실질적인 해결 방안이 아니다.


앞선 칼럼에서도 지적했듯이 누구도 위계적인 발언을 들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니까 실수로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종종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람이니까 그 발언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정확한 후속 조치와 보상체계를 대응하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도리 아닐까. 왜 이런 문제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을까. 우리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큰 것을 바란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시나요? 안정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예술가들이 서로 상호작용 하기를 바랍니다. 누구도 이런 문제에 봉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봉착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과와 제대로 된 보상체계 안에서 안정적으로 생존권을 보장받고자 합니다.


이것이 그렇게 큰 욕심인가요?


사랑해 작가가 지적했듯이 “'내 작업을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보여주는 일’에 대한 정당한 금전적 대가에 대해 우리는 왜 이렇게 절실해야만 할까요?” 왜 예술가는 계속해서 갑과 을이라는 딜레마 속에서 갈등하며 자신을 검열의 대상에 놓아야 하는 걸까. 예술이 예술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검열이 아닌 자유로운 사고와 작품의 움직임 속에서 발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문제적인 것은 사랑해 작가님 외에 다른 두 명의 작가님들은 계약서조차 쓰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이것은 일부 오해의 논지가 있어 사랑해 작가의 말을 덧붙인다. 사랑해 작가의 말에 의하면 10인의 작가 중 5인, 5인으로 나누어 총 2번의 워크숍을 진행했고 앞선 금요일에 워크숍을 진행한 작가들은 계약서를 작성하였으나 이후 토요일에 워크숍을 진행한 작가들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즉 사랑해 작가님 외의 두 분의 작가님은 토요일에 워크숍에 참여하셨고 그렇기에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약서는 형식적인 것이니 너무 걱정마시구요~ 라는 말, 이 말속에서 계약서를 요구하면 예민한 작가가 되어버리는 이 상황이 80년대 노동시장의 현실과 너무 닮아 있어서 서글프다. 구두계약이 팽배한 예술계 내에서 “계약서를 쓸 권리” 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예술인들에게 “계약서를 요구할 권리”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 사랑해 작가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정말로 낯선 것일까?


나는 지금의 직장에 취업하면서 근로계약서를 입사 이후 3주 후에 작성하였는데. 3주 이후에 작성할 때 대표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근로계약서에 들어가는 내용도 개인 정보인데 왜 그렇게 개인 정보를 남발하지 못해서 안달이야?”라는 식의 워딩이었다. 이것이 정확하게 그가 말한 바는 아니지만, 이런 워딩의 말을 내가 기억한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적이다. 노동 시장에서 근로자에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권리는 이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근로 시장 안에서 이 조차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고 또 이러한 오래된 관행이 예술계 안에서 답습되고 있음은 여전히 예술계 안에서 “예술가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또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 말, 이 말 자체가 가지는 문제의식은 "계약서란 형식적인 것이며 이것이 결코 너의 모든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점 또한 80년대식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해 슬프다. 사랑해 작가는 이런 상황은 “상위 단체의 판단에 따라 계약서를 쓰는 일이 일방적으로 불발되거나 불안정한 계약 관계에서 (예술가가) 을의 관계를 자처하게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근로계약서가 너무나도 당연해진 지금 이 시대에서 우리는 예술가들의 안전한 노동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다.


무엇이 예술가들의 안전한 노동환경을 약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지만 예술가들의 안전한 노동환경을 약속하고 그 속에서 예술가들은 차별과 배제를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술가로서 작가로서 고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함께 호흡하며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말, 그 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문화를 향유하고 사랑하는 여러분들께 호소하고 싶다. 더 많은 예술을, 더 많은 시선과 세계를 마주하고 싶다면 예술가들의 생활과 처우에도 관심을 기울여주세요. 부디 우리가 우리로서 생존하는데 예술을 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성평등 전주, 전북여성문화예술인연대의 이와 같은 행위를 규탄하며 작금의 사태에 깊은 연대를 위해 이 글을 남깁니다. 부디 이와 같은 문제들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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