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계피 Feb 22. 2023

세련되고 위트 있게 글을 쓰라는 직장 상사에게

작가라는 사람이 이게 최선이에요?라고 말하는 직장 상사와 근무 중이라면

직장 상사에게 "작가의 시선으로 세련되고 위트 있는 전문적인 글을 써라."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내가 작가로서 역량이 부족해서 이런 말을 듣는 건가 싶었는데. 듣다가 보니 이 말이 나의 작가적인 역량을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자기들이 생각했던 작가가 아니라서 아무렇게나 가져다가 붙이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때 자기들이 생각하는 작가란 지들 머릿속에 있는 말을 내가 가지런히 자기들 취향과 니즈에 맞도록 작성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건 작가의 역량이라기 보단 센스의 영역이고 센스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사가 좀 더 세련된 지시를 해 줄 필요가 있는데 이들은 보통 침묵하면서 내가 알아서 잘 써주기를 바란다. 진짜 어쩌라는 심보인지 잘 모르겠다.




TO. 직장 상사님께.


겨울이 저물고 있는 오늘은 비가 왔으면 했습니다. 비가 오면 날이 따뜻해질 테니까요. 날이 따뜻해지면 상사님은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혹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저는 지난가을 어머니가 사주신 코트를 입고 꽃놀이를 갈 계획입니다. 청록색이 영롱하게 빛나는 코트입니다. 백화점에서 산 옷은 아니고 동네 보세 옷가게에서 산 옷이에요. 늘 제가 백화점에서 옷이나 사서 입고 꾸미고 다니는 대가리 텅텅 빈 년이라고 하신 거 다 알아요. 네, 사실 저한테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색이죠. 그냥 특이하고 화려한 색이라서 입어 봤는데 너무 잘 어울려서 어머니가 사주셨어요. 그날 어머니 옷을 사러 간 거였는데 한번 입어보라고 하더니 사주셨지 뭐예요. 제가 저희 집에서는 이렇게나 사랑받는 딸이랍니다.


모르셨다고요? 괜찮아요.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참으로 많이 궁금하실 테지만... 읽는 사람의 감정과 상태를 고려한 대화를 지속적으로 저도 정말로 이어가고 싶기는 한데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희 사이에 어떤 감정적인 교류가 있지 않았기에 뜬구름 잡는 날씨 이야기 말고는 할 말이 없네요. 상사님도 동의하시는 부분일 테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이딴 말을 쓸수록 상사님은 이 새끼가 뭘 잘 못 먹었나 싶을 테고 저는 이딴 말을 쓰면서 내가 왜 내 재능을 이딴 것에 낭비하고 있나 싶을 테니까요. 서로의 값진 시간을 낭비하는 선택은 우리가 같은 직장에 있었던 찰나로 충분하겠죠.


상사님, 상사님께서는 작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놀랍게도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도 있는데. 혹시 알라딘이나 교보문구에서 작가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늘 작가라는 직업이 궁금했고 그들의 삶이 궁금했답니다. 그래서 문예창작학과로 진학하고 제가 동경하는 작가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작가의 삶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했답니다. 작가란 무엇이냐? 혹시 이 문장을 전우치 도사의 톤으로 읽어주시겠어요? 작가란 무엇이냐? 작가란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사람, 그것이 나 바로 작가다. 


저는 상사님이 살면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음,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도 아니니까 이제 와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상사님은 상대방의 업무와 직군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전혀 없으시거든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까요?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들릴게요. 저는 어디서 무슨 석박사 했다고 하면 그냥 그 사람이 그 분야에 관심이 많구나, 정도로 생각해요. 요즘에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도 하고 학력이 지적인 수준에 대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종종 하거든요. 물론 공부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죠. 돈과 시간을 들여서 투자했는데 그에 대한 성과가 지적인 능력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다? 음, 저 같아도 억울하긴 할 텐데 제가 사회 나와서 사람들 겪어보니... 그냥 상대평가적인 관점에서 타인보다 해당 직군에 대해서, 해당 학문에 대해서 더 잘 알 뿐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에서 지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더라고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상사님께 드리는 걸까요?


제 직장 상사인 상사님의 직함은 보통 작가가 아니라 피디나 감독, 기획자시죠. 그게 무슨 말일까요? 저랑 직군이 다르다는 의미겠죠. 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조금만 더 참아보세요. 저한테 인수인계도 안 해주면서 일처리 하라고 한 건 상사님들 이시잖아요. 어머, 어떻게. 혹시 난가 싶으신가요? 이 글 읽으면서 난가 싶은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닐 테니 그걸로 조금 위안 삼으시면 좋겠네요. 댓글로 네이버 밴드 모임이라도 만들어보세요. 유머는 여기까지. 화나신 거 아니죠? 인간은 유머를 통해 성숙해진다고 하던데. 상사님, 유머를 좀 키워보셔야겠어요. 


사람은 자신이 놓인 상황 외의 다른 상황을 인식하고 그에 대해 판단하거나 개입하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 공을 들이게 되더라고요. 특히 그것이 그 사람의 직업이나 작업물과 연결이 돼 있을 때, 내가 모르는 것인데 말을 잘 못 해서 상대에게 결례를 범하거나 상처를 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마음 때문에요. 저는 이런 감정들이 인간과 인간의 선을 만들어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직장이라는 곳은 이상하죠. 왜 사람들이 인간의 기본적인 선조차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상사님이 영상 편집 하기 싫다고 해서 제가 상사님 면전에 어휴, 직업인데 그게 하기 싫으면 돈 값을 못하는 건데 그걸 왜 못할까?라는 말을 안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상사님이 기획서 쓸 때 어휴, 저게 직업인데 내가 이 부분 하는데 네가 그 부분만 잡고 있으면 나보고 일 다 하라는 거니?라는 말을 아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사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제가 어휴, 그렇게 하면 미관상 안 좋아요,라는 말을 아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그 일에 대해서 잘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상사님은 왜 자꾸 저한테 상사님 마음속에 있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글을 바랄까요? 상사님은 혹시... 이 세상의 모든 작가들의 글에 공감하고 눈물짓는,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눈물짓는 틴에이지 감수성의 훌륭한 독자이신가요? 그래서 저한테 당신의 간지러운 마음 구석에 난 털을 핀셋으로 콕콕 뽑아주시기를 원하시는 걸까요? 


죄송한데 그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상사님의 회사에서 상사님의 연봉 세배를 받아도 못 해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언어와 세계관이 있고 그 안에서 소통하는 존재죠. 언어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프로세스의 집약체인데 그냥 마음에 안 들면 안 드는 거지 그걸 뭐 능력으로 운운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작가인데 이것밖에 못하냐고 말씀하실 거면 상사님도 좀 작가에 대해서 알고 말씀을 하시면 좋을 텐데 말이죠. 아무것도 모르고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작가라는 단어 하나 이력서에 쓰여 있다고 작가인데 이것 밖에 못해요?라고 하면. 심지어 작가 채용 한 적도 없는 회사라고 하면서 저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요.


이전에 작가가 있어서 그 업무 인수인계 해준 것도 아니고, 프로세스가 있으니 따르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네 마음대로 하는데 내 마음에는 안 드니까 상사님 마음속에 있는 백과사전을 열고 상사님의 언어로 일을 처리해 줬으면 좋겠어라고 하면. 저는 독심술을 전공해야 했나요?


막역한 우리 사이에 이런 걸 구구절절 말한다고 또 서운해하시면 저는 할 말이 없지만. 상사님, 잘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고 남의 직군에 대한 폄하와 비존중적인 태도는 접어두시는 게 어떨까요? 사회생활이 현대인이 피할 수 없는 일과라면... 즐겁게 웃으면서 하면 좋잖아요. 작가는 모든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헛소리도 좀 그만하시고요. 작가가 무슨... 어휴, 괜히 아가들 마음에 상처 줘서 어설프게 그루밍과 가스라이팅 좀 하겠다는 상사로써의 권위적인 의식과 태도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한 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아요.


그럼, 이번 생에서는 마주치지 않길 바라며.





사실 이번 콘텐츠를 기획하면서 어떻게 해야지 이것이 작가들의 공통적인 경험이라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특정인에 대한 언급이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기도 했고... 일기장을 뒤져 내가 작가라서 들은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모아봤다. 내가 겪은 직장 상사들이 내가 작가라서 나한테 했던 말들을 사혼의 구슬 조각처럼 조금씩 주워 모아서 담을 수 있는 만큼 담아보았다. 


심리학과에게 심리테스트 해달라는 말은 날 죽여 달라는 말로 해석되곤 하는데, 작가에게 작가인데 그게 최선이냐는 말이나 팬픽 써 달라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통용될 수 있다. 서로 잘 모르면 알아가려는 노력도 없이 서로를 깎아 내리는 것이 사회생활의 지엄한 법도 인 것 같은데, 나는 정말로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이 너무 지친다. 왜 다들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 주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사고하면 사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 해답은 퇴사고 이번 생에서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것이겠지.


네, 상사님. 물론이죠, 너무 좋네요. 말씀대로 다음 생에서도 만나지 말아요.


네네, 영원히 안녕. 안녕이라는 말도 그만하고 각자 갈 길 갑시다.

작가의 이전글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예술인은 누가 보호하지?(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