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여소득자인 척

난 아직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

by 김연큰

돈을 다루는 곳들은 참으로 차가운 속성을 지녔다. 딱히 나에게 나쁘게 군 것은 없다. 그저 그들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충실함은 퇴사 후 내가 처한 현실을 가장 자주 일깨워 주었다. 너는 직장이 없어, 너는 급여가 없어, 그래서 너는 지금 직업이 뭐니?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아는 명백한 사실이라 해도 그걸 반복해서 자꾸 일깨우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빨리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는 건지, 가족들도 하지 않는 독촉을 하는 느낌도 든다. 주변을 아무리 차단하고 부모님께 이해와 양해를 구해도 거기까지. 독촉은 의외의 곳에서 날카롭게 날아왔다.




기타 무직자


어느 날, 모 금융기관에서 직장 정보를 확인하라는 알림이 왔다. 매년 보내는 알림이다. 특별할 것도 없다. 과거에는 고마운 측면도 있었다. 이직해 놓고 직장 정보를 바꾸지 않아 전 직장으로 우편물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오류를 방지할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이런 알림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상황이 문제다. 전과 달리 이제 난 직장 정보가 없다. 이전 직장을 놔두자니 양심에 찔리기도 하거니와 더 이상 이전 직장과 연결되고 싶지 않다. 그래, 뭐 바꿔 보자-하며 정보수정 메뉴로 들어간다. 연락처 변동 없고, 집 주소도 변동 없고, 직장은 '없음'으로 체크하고, 에 또 그리고......


문제의 직업이 등장한다. 지난 10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업주부'는 택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주부가 아닌 걸 어쩌란 말이냐. 그런데 그 외의 직업 중 딱히 해당되는 게 없다. 내가 준비 중인 일에 대해서는 아직 직업으로 선택하기 어렵다. 그러면 다른 것 중에 가장 적합한 게 뭘까 고민한다. 카테고리 별로 나뉜 이런 직업 저런 직업을 살펴보다 결국 '기타 무직자'를 선택한다.


기타 무직자여도 소득이 있을 수는 있어서인지 세부 항목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관련이 없다. 연금 소득이나 배당 소득이 있을 경우 선택하는 항목이었다.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넓게 보면 나는 취업 준비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금융과 신용의 세계에서는 그런 걸 알아주지도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그 세계에서 '준비생'은 '무직자'와 동의어일 뿐이었다.




나에게 주는 급여


그래도 나에게는 아직 돈이 있다. 못해도 1년, 운이 좋다면 1년 6개월까지도 버틸 수 있는 돈. 이 여유자금이 없었다면 퇴사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 돈은 모 증권사 CMA 통장에서 아주 조금씩 몸을 불리고 있다. 한 푼이라도 아쉬운 마당에 증권사 CMA가 은행 이자보다는 더 주니까 그쪽에 터를 잡았다. 여기서 기존 급여일마다 주거래 은행으로 이체할 참이었다.


이는 급여통장 혜택을 받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급여통장으로 받는 혜택은 꽤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으로 삶에 와닿는 혜택은 타행이체수수료 면제, 자동화기기수수료 면제, 인터넷뱅킹 타행송금수수료 면제 등이었다. 물론 주거래 은행이 아니어도 송금 수수료 면제를 받는 방법은 있지만 생활비를 주거래 은행에 두는 이상 그 은행에서 혜택을 보는 편이 아무래도 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급여 통장으로 인정받는가? 예전에 그런 글을 본 적 있다. 은행의 급여통장 인정 범위만큼 급여 통장에서 타행 통장으로 이체하여 혜택을 받으라는 글. 그러고 보니 비록 내가 회사로부터 받는 급여는 없지만 내가 나에게 급여를 줄 수는 있잖아? 어차피 목돈의 터를 증권계좌에 잡았으니 주거래 은행에 생활비를 급여처럼 매달 이체하면 되잖아? 내 명의로 보내면 인정이 안될 수 있다는 내용도 어디선가 접했지만 다행히 내 주거래 은행은 그렇게까지 까다롭지 않았다. 입금 메모(적요)에 '급여'라는 단어가 들어가고 매달 50만 원을 넘기면 되었다.




셀프 급여의 지속성


그래도 혹시 몰라 몇 달 지켜보았다. 그 결과 8월, 9월, 10월 모두 급여로 인정됨을 확인했다. 덕분에 회사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급여통장 혜택을 받고 있다. 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이렇게 급여인 척하는 급여를 받으면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CMA 계좌에서 보낼 돈, 그러니까 생활비로 생각하고 마련했던 여유자금이 떨어질 때까지 내가 소득이 생기지 않을 경우다. 급여통장 인정을 받지 못하면 어떤 수수료가 붙을지 모른다. 직전 글에 언급했다시피 직장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실질 물가가 상승했는데 이와 비슷하게 급여통장 자격을 잃으면서 전에 없던 지출이 또 추가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기면 다른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송금수수료 같은 것은 토스, 카카오페이 등을 이용해서 절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수수료를 그렇게 아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수수료와 별개로 생활비는 마련해야 한다. 내년, 즉 2026년 하반기까지 소득이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아르바이트라도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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