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알려주신 사과와 감사의 적시(適時)

인간관계에서의 실패담 1편.

by 김연큰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제가 무언가 잘못했을 때 그 아픔은 크게 두 가지로 오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잘못을 저지른 그 순간 크게 아프고 후회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물어 어느 정도 덤덤하게 되는 경우이고요. 다른 하나는 잘못을 했을 당시에는 마음이 조금 불편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후회되고 아픈 경우 말이죠. 이번 이야기는 후자에 해당됩니다.




나를 보듬고 키워주신 외할머니


저는 동시대에 태어난 아이들과 비교하면 꽤 크고 무겁게 태어났습니다. 소위 말하는 우량아란 뜻입니다. 엄마가 저를 어떻게 뱃속에 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어날 때도 엄마를 꽤 힘들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찌나 잘 먹던지 키도 몸무게도 금세 늘었습니다. 빼빼 마르고 몸집이 작았던 엄마가 돌보기에 저는 너무 컸습니다. 근처에 친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엄마와 저의 상황을 보다 아빠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합니다.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라는 내용이었는데요, 엄마가 무남독녀이고 외할머니 홀로 계신 상황을 고려하고, 아무래도 시어머니인 본인보다 친어머니가 엄마에게 편하지 않겠냐는 근거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외할머니 손에 자라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할머니는 곧 친할머니가 아닌 외할머니입니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할머니와 찍은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저의 어릴 적 기억 속에도 할머니와 함께한 기억이 훨씬 많고요. 책을 읽어주신 기억, 재워주신 기억, 초콜릿을 사주시던 기억, 아픈 날 토닥여주시던 기억, 제 머리를 빗어주시던 기억, 할머니 품에서 키를 재보던 기억, 같이 뒷산을 오르던 기억, 나비와 잠자리를 잡던 기억, 초등학교 들어간 후에는 항상 등굣길에 배웅해 주시던 기억 등등 꼽자면 한도 끝도 없을 정도로요.




사춘기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괴롭힌다


엄마와 아빠 기억에 저는 사춘기에 별 사고도 치지 않고 얌전히 지나간 걸로 보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렇지 않았어요. 할머니에게 참 못되게 굴었습니다. 어느 순간 말도 별로 하지 않았고, 쌀쌀맞게 굴었지요. 특히 할머니가 아프신 후로는 더욱 그랬습니다.


중학생이던 어느 여름날, 하교 후 힘들다며 현관에서 그대로 거실을 향해 벌러덩 드러누웠는데 집안 공기가 뭔가 다르다 느꼈습니다. 엄마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저는 눈치껏 일어나 조용히 방으로 갔습니다. 당시 저는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누워 계셨습니다. 평소 아침마다 오르시던 뒷산에 가시다가 갑자기 쓰러졌고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다녀오셨다 합니다.


진단명은 중풍이었습니다. 어릴 적 저는 중풍이 뭔지도 몰랐어요. 다만 할머니는 제가 알던 할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말을 못 하셨어요. 소리를 내는데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말씀하시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본인의 의사와 다른 소리가 나는 것에 무척 당황하셨고, 계속 이게 아니라는 듯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습니다.


저는 그런 할머니가 낯설고 이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의 뜻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가장 답답하고 힘든 분은 할머니 본인이셨을 텐데 저는 그렇게까지 할머니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할머니가 이상하다고, 못 알아듣겠다고, 얘기하기 싫다고 점점 할머니를 멀리했습니다. 할머니로선 젖먹이 때부터 품에 안고 키운 아이가 할머니가 말을 제대로 못 한다는 이유로 싫다고 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자신의 말이 뜻대로 나오지 않는 현실에 상심이 깊어진 할머니는 어느 날 칼로 손목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사람 생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끊이지 않아 할머니는 무사하셨어요. 그 사건은 할머니가 처음 아프셨을 때처럼 역시 제가 학교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현장을 보지 못해 현실감이 없었던 탓일지, 혹은 할머니 때문에 매일같이 우는 엄마를 보기 힘들어서였을지. 저는 할머니에게 더 화를 내고 할머니를 더 멀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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