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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는 처음이라

초보 대표의 성장통과 되고자 하는 대표의 모습

by 김마이너
좌충우돌 로펌개업기






반장, 부반장 한 번 한 적도 없는데


어릴 적 나의 모습을 회고하자면, 엄격한 부모님 하에서 자란 여느 아이가 그렇듯 숫기 없고 자기 표현을 못하는 그런 아이였다. 어딘지 자신감 없고 어리숙한.. 당시 나는 내가 뭘해도 스스로 어설프다고 생각했었다(직원들이 볼 수도 있는데 이런 고백을 하는 것도 참 부끄럽네).


당연히 그런 성격 덕에 다른 친구들 앞에 나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었고, 학창시절 당연히 반장, 부반장 한 번 하지 못했다(안 어울리게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이 억지로 시켰던 선도부장을 제외하곤). 반장, 부반장이 뭐냐? 대학교 때까지 조별 과제, 발표 수업이 있는 건 피하고 숨어다녔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다 보니 구성원 17명 규모의 로펌의 대표가 되어버렸다. 처음 홀로 개업하고 이럴 생각까지는 딱히 없었는데 일이 너무 많아 절차적인 업무를 맡길 직원 한 명을 뽑았던 게..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를 탄 것처럼 탈선하거나 앞으로 계속 달리거나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회사는 직원을 한 명이라도 뽑게 되면 그 직원 월급도 올려줘야 되고 승진도 해야 하다 보니 무조건 성장해야한다). 그러니 무작정 달릴 수밖에! 회사는 다행히도 계속 성장했고 일이 많아지며 한두명씩 모이면서 회사가 커저버렸고 나름 어엿한 대표가 된 것이다.


근데 문제는 대표는 처음이라.. 어떻게 회사를 운영해 나가야 하는지, 대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알지 못했다.




대표는 처음이라


대표는 처음이라 모든 것이 미숙했다. 회사를 이전에 차려봐서 대표를 해봤거나 미리 사업을 계획했어서 경영수업이라도 받았으면 좋았을 걸. 요즘은 유치원 때부터 선행학습을 한다든데 대표 선행수업은 왜 없는 건지.


하지만 대표는 잘 모르는 초보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대표는 모든 걸 다 잘 알고 능숙하게 진두지휘 하는 모습이었다. 다 잘 하고 싶었다. 변호사 실무도 잘 하고 영업, 수임도 잘 하고 인사 관리도 잘 하고 리더십도 좋고 조직문화도 만들고 등등. 근데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다 잘 할 수는 없을 뿐더러 내가 먼저 넉다운이 됐다. 너무 많은 걸 신경쓰다 보니 일의 효율성이 줄어들었다. 직원들에게도 대표의 마이크로매니징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사업 책에서 말로만 듣던 '위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냥 위임을 한다면 그건 위임이 아니라 방치가 된다. 해당 업무의 목적과 배경, 원칙을 명확히 설명하며 업무를 위임해야 하고 위임한 후에도 주기적으로 업무를 관찰하며 조정해야 한다. 가장 좋은 건 회사 차원에서 매뉴얼을 확립하여 시스템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초보 대표의 두번째 문제는 직원들과의 거리이다. 처음 회사가 몇 명일 경우에는 가족 같은 분위기라 직원들과의 거리가 가까울 수 있지만 열 명대에 진입하면 그 거리가 부담스러워질 수 있다. 존 맥스웰의 <리더십 수업>에서는 직원들과의 인간적인 관계 유지가 리더십의 조건이라고 하지만 내 경우엔 너무 가까워도 문제가 되었다. 직원들이 잘못된 행위를 했을 때, 반복적인 실수를 할 때 싫은 소리를 해야했지만 그게 어려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직원들이 행동을 교정할 수 있도록 쓴 소리도 가끔 해야 하는 것이 대표의 책무이고 그게 직원들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잘못된 걸 보면서도 눈감고 있다면 대표의 직무유기다. 물론 싫은 소리를 싫지 않게 어떻게 현명하게 전달할 지가 중요하다.




어떤 대표가 되고 싶어?


대표를 몇년간 하면서 대표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나는 어떤 대표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대표의 유형은 다 한 가지만 있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대표의 유형들이 있다면 내가 롤모델로 삼고 싶은 대표의 유형도 있지 않을까.


학창시절에 감명깊게 읽었던 <초한지>가 생각이 났다(개인적으로 삼국지보다 초한지를 좋아한다). 누가 봐도 강한 뛰어난 장수 항우와 시정잡배 출신 유방의 대결. 항우가 99번의 전투에서 유방을 이겼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유방이 항우를 이김으로써 역사가 달라졌다. 시정잡배 출신인 유방이 황제가 된 비결은 뭘까?


시바료타료에 따르면 유방이란 사람이 허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 자체의 능력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인재를 포용하고 의리를 지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유방을 따랐다. 물론 중국을 통일한 데에는 한신이라는 위대한 장수가 유방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 크지만 그마저도 유방의 능력이 아닐까. 즉, 유방은 무위의 덕을 실현한 리더라고 볼 수 있다.


유방을 떠올리며 위안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잘할 필요가 없다, 압도적 카리스마를 갖출 필요도 없다. 그런 그도 황제가 되었는데 이 조그만 로펌의 대표 정도야ㅎㅎ 내가 모르는 걸 다 잘 아는 척, 능숙한 척 할 필요 없이 모르는 건 모른다 터놓고 미숙한 건 미숙하다 고백하고 직원들과 같이 나아가면 된다. 또 우리 안에서 능력이 부족하다면 좋은 인재를 구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나니 황송하게도 우리 로펌에 정말 뛰어난 분들이 알아서 모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말하기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셨다.


어렸을 때는 무슨.. 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그 말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직 완성이 되진 않았지만, 매일 대표인 나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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