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러 교수님과의 인연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풀러선생의 제자로 당첨된게 반드시 그 계량 경제학 과목에서 A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였던것 같다. 내 4년 선배는 그 학년에서 최고 우수한 학생에게 주는 Snedecor Award 라는 상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는데 그 선생이 강의하신 시계열 분석 과목을 듣고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찾아갔는데 "나는 더이상 시계열 분석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돌려보냈었기 때문이다. 그 선배도 그 과목에서 A 를 받았고 무척 잘했을텐데도 그 제자로 당첨되지 못한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암튼 그 연구실에 들어가려면 무언가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당시 풀러 선생한테 전략적으로 적절한 방식으로 나 자신을 알렸다. 아이오와 주립대로부터 입학허가를 받고나서 풀러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그 당시는 이메일 이런게 없었기에 우편으로 보냈는데 한국에서 보내는 것이라 국제 특급 등기 우편으로 보냈다 (거의 5-6만원 드는 비용이었다). 그 편지에는 내가 샘플링을 전공하고 싶어서 학교를 정해야 하는데 당신의 연구실에 박사과정 학생 자리가 있는지 궁금하다. 만약 자리가 없다면 나는 아이오와를 갈 이유가 없기에 미리 문의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 보름 정도 지나니 한국에 있는 우리 집으로 답장이 왔다. 똑같이 특급 등기 우편으로 답장을 하신 것이다. 먼저 입학을 축하하고 우리 연구소에서 샘플링 관련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니 샘플링을 꼭 전공하고 싶으면 우리 학교로 와서 나랑 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연구소 소속 젊은 교수들이랑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나중에 아이오와에 도착하자 마자 학기가 시작하기 이전에 교수님을 찾아갔었다. 통계학과 건물 2층에 올라가서 복도에 어떤 사람이 있기에 다짜고자 "풀러 교수를 찾으러 왔으니 연구실 위치를 알려줄수 있냐?"고 물었더니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대답을 하셔서 연구실에 가서 인사를 했다. 내가 요전에 한국에서 편지를 보냈던 그 학생이다. 나는 샘플링을 하고 싶어서 아이오와에 왔으니 선생님 밑에서 공부할 기회를 갖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인자하게 웃으시면서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중에 찾아오라고 하셨다.
그 선생님의 계량경제학 과목을 들으면서 물론 나는 질문 한마디 못하는 조용한 학생이었지만 중간고사에서 99점을 받고서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 좋은 점수를 받았으니 잊지 마시라 이런 이야기를 했었고, 선생님은 계속 열심히 해라고 격려를 하셨다. 기말에서 최종 성적이 나오고 다시 찾아갔더니, 다른 과목은 성적이 어떠냐고 물으셔서 다 A 를 받았다고 대답하니, 그럼 우수한 학생인듯 하니 우리 연구소에서 연구조교로 같이 일하자고 말씀하셨다.
물론 내가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얻은게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풀러 선생도 샘플링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상황이었는데 한국의 어떤 젊은 친구가 샘플링을 진지하게 공부하고자 하는 자세를 보이니 그게 기특해서 받아주신 면도 있는것 같다. 샘플링이라는 분야가 워낙 통계학에서 소외되는 분야이다보니 그 분야 내에서는 나름 끈끈한 것도 있고 우리는 음지에서 힘든 노가다를 해가며 현실문제를 다룬다는 긍지와 애정이 생긴다. 게다가 이 분야가 워낙 오래되고 전통적인 분야라 유행에 뒤쳐져서 젊은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 학문의 명맥이 유지되도록 특별히 노력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그걸 다 알고 미리 계산한 것은 아니지만 알고보니 이 동네가 그런 동네였던 것이다. 조그마한 흠이라도 발견되면 트집 잡아 논문 리젝주고 어린 싹을 밟는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분야도 제법 있음) 조금 부족해도 관대하게 대하고 성장할수 있도록 격려하는 분위기였으니 내가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선생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고난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