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암의 추억 (3)

유학을 떠나다

by 김재광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가지 장벽을 넘어야했다. 첫번째는 병역 문제였다. 당시 나는 삼성전자에 이미 취직이 예약된 상태였고 석사과정을 마치고 삼성전자를 가서 5년 근무를 하면 석사 병역특례로 군대가 해결되는 상황이었는데 그 5년을 마치고 유학을 갈수는 없을것 같았다. 둘째는 경제적 문제였다. 내 학점으로는 장학금을 받는다는건 불가능하다고 봤으므로 자비로 일단 간 후에 2년 정도 열심히 해서 괜찮은 성적을 받으면 장학금을 받을수 있을거라는 선배들의 조언을 들었다. 당시 계산해 보니 등록금 제외하고 한달에 1백만원, 등록금까지 포함하면 대략 1년에 2천여만원이 드는 비용이었다. 세번째는 과연 어드미션이 오겠냐는 것이었다. 내 학점으로는 지원한 대학중 한군데에서도 어드미션이 오지 않을수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심을 했다. 군대를 가서 병역 문제를 해결하고 미국 유학에 도전하기로. 다행히 현역이 아닌 방위라서 18개월만 근무하면 되는거니 삼성전자에서 5년을 보내는 것보다는 시간적으로 훨씬 나은 옵션이고 또 방위를 하면서 유학에 필요한 시험준비를 할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인 문제는 부모님의 승락을 받았다. 2년 정도까지는 부모님이 지원해 주시기로 했다. 세번째 장벽은 교수님으로부터 만약 유학 어드미션이 안나오면 서울대 박사과정으로 받아줄테니 지원하라는 말씀을 듣고 안심을 하게 되었다. 유학 어드미션이 안나와도 내가 공부할 길이 없는건 아니니 내가 삼성전자를 포기하고 군대를 가는게 아주 위험한 도박은 아닐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군대 입영 날짜가 절묘하게 93년 2월 초에 나와서 94년 7월말에 제대하고 8월에 유학을 떠날수 있었다. 한달의 시간 낭비도 없었던 것이다. 방위를 하면서 GRE 시험, 토플 준비를 하고, application 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대학생 1학년때 받은 1주일 병역입소 체험 혜택으로 18개월에서 3주 일찍 제대하고 (그 당시에는 그런 혜택이 있었다), 그래서 7월 말에 제대를 한후 8월에 유학을 떠났다. 빡빡머리가 다 자라기 전에 출국을 한 것이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몇군데에서 어드미션이 나왔는데 앤아버의 미시간 대학과 아이오와 주립대학 중에서 고민하다가 아이오와를 선택했다. 일단 아이오와가 등록금이 더 쌌었고 거기에 Fuller 라는 교수가 샘플링 분야의 세계적인 대가라고 해서 그 교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 학교를 선택했다.


그래도 막상 출국하는 날은 제법 긴장이 되었다. 과연 내가 제대로 적응할수 있을지, 학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수 있을지 등등. 공항에 마중을 나온 가족들과 이별을 하는것도 심란했지만 시카고행 비행기 내에서 영어 안내방송을 하는데 한마디도 못알아 들어서 계속 줄담배를 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는 비행기 내에서 흡연이 가능했다. 비행기 중간에 커튼이 쳐 있는데 그 앞은 비흡연석이고 뒷부분은 흡연석 공간이었다. ) 금도암의 말 한마디에 내가 이렇게 미국까지 가게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에 대해 묘한 긴장감과 흥분을 느꼈다.


막상 도착해보니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걱정했던 것보다는 지낼만 했다. 특히 같은 대학 같은 학과 4년 선배가 계셨는데 너무 사람이 좋고 푸근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미국에 도착한 두번째 날에는 그 선배가 어느 유학생 가정집에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서 거나한 막걸리 술잔치가 있었다. 한인 유학생들이 모여서 막걸리를 직접 빚어서 파전에 돼지수육을 삶아놓고 흥겨운 잔치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막걸리를 먹고 흥에 겨워 소방차 춤으로 화답하면서 놀았는데 술이 과했는지 아니면 무리한 덤블링에 시차적응이 안되었는지 필름이 끊기고 기절을 해서 잤다. 그게 미국에 도착한 두번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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